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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티하이커 Mar 25. 2019

단골손님

역삼동에서

2016년 8월 5일 금요일


너무 뜨거워 더위를 먹었던 어느 주말, 우연히 방문했던 역삼동의 바​. 나는 그곳의 단골이었다.

그곳은 서교동과 신사동에 이어 세 번째로 방문한 바였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웅장함은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을 충분히 압도했으나,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그곳의 단골이 되리라는 것은 예상치 못했다.

한 명의 단골손님을 얻기 위해선 두 번의 허들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최소한 손님이 한 번은 더 와야 기회가 있다. 둘째, 그의 마음을 얻어 친구가 된다. 이곳은 단숨에 두 개의 허들을 뛰어넘은 첫 번째 바였다.




그해 여름, 달력이 7월에서 8월로 바뀌었고 내 회사생활에도 물결이 출렁였다.

3년째 의지하던 친한 부서 선배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여 동지를 잃는 듯한 참담한 기분으로 회사를 다니던 참이었다. 커리어는 갑자기 전환되어, 직무 전환과 관련된 3개월짜리 장기교육을 가게 됐다. 8월 첫째 주 금요일은 교육을 가기 전 마지막 근무일이었다. 남은 일을 모두 끝내고, 인수인계서를 써야 하기 때문에 정말 바쁜 날이었다. 오후 네다섯 시쯤 친하게 지냈던 과장님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할 말이 있어요. 미리 얘기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대리님이 이제 교육을 가서..."
과장님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대리님이 교육이 끝나고 돌아올 때쯤이면... 저는 여기 없을 거예요. 저도 그만두게 되었어요."

믿을 수 없었다. 상사의 압제에도 회사를 다닐 수 있었던 유일한 원동력인 사랑하고 존경하는 두 선배가 내 곁을 떠난다니. 난 이제 정말 혼자였다.

과장님과 함께 상사에게 구박을 받으며 남대문에 행사물품을 사러 다니고, 저 멀리 관악구에 있는 제과점으로 가 여자 둘이서 단팥빵 80개를 사서 낑낑거리며 들고 오던 추억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선데 아이스크림을 앞에 둔 채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눈이 부은 채로 더운 사무실에 남아 일을 하고 있었다. 선배 한 명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내가 직전에 받은 고과의 비밀을 알게 됐다. 업적 고과인데, 업적으로 받은 게 아니라 상사의 개인적인 심리상태로 정해졌다는 최악의 진실이었다.

모든 업무를 마치니 꽤 늦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망신창이가 된 마음을 안고 이대로 집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저녁을 먹지 못해 배가 고팠고, 사무실과 그리 멀지 않은 역삼동 바의 환상적이었던 파스타가 떠올랐다. D에게 연락해 그곳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사무실에서 강남역 1번 출구까지, 그리고 역삼역 10번 출구에서 목적지까지 걸어가며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바에 도착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해방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D는 이미 도착해있었고, 칵테일도 이미 한 잔 시킨 상태였다.

"나 이미 한 잔 시켰어."
유리잔에서 짙은 허브 냄새가 났다.
"이름이 뭐야?"

"V&B Combine이라고 합니다."
지난번에 다양한 럼을 친절하게 소개해 주셨던 수염이 있는 바텐더님이 대답했다.
"보드카와 바질이 들어갔다는 의미이죠. 예전에 제가 일하던 가게에서 만들던 칵테일이었습니다. 친구분이 보드카도, 바질도 좋아한다고 하셔서 만들어 드렸어요."

허브 리큐르인 베네딕틴과 샤르트뢰즈를 내수동에서 처음 접했을 땐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바질과 어우러지니 향긋하고 산뜻해 마음에 들었다.

바질은 파스타나 피자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칵테일의 가니쉬나 주재료로 왕왕 쓰이는 허브였다.

나는 폭염에 걸맞은 모히토를 주문했다. 이로써 헤밍웨이가 남긴 "나의 모히토는 라 보데기타에서, 나의 다이키리는 엘 플로리다타에서" 중, 둘 다 만나본 셈이었다. 민트보다는 레몬이나 라임이라, 모히토보다는 다이키리 쪽이 좀 더 취향에 맞지만 한여름의 불볕더위에는 모히토가 제격이었다.

처음 왔을 땐 럼을 마셔보았으니 이번엔 테킬라에 도전해보자며 야심 차게 슈퍼 프리미엄 테킬라 1800 Anejo를 주문했다. 오래 숙성되어 짙은 황금빛을 띠었다. 코냑을 숙성한 통에 보관하여 테킬라의 코냑이라 불린다는 술이었다. 접시엔 소금과 설탕 약간, 라임이 서빙되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테킬라예요."
바텐더님이 웃으며 잔을 건네셨다. 잔뜩 기대하고 한 모금 마셨더니 후추향이 났다. 나와 맞지 않았다.

결국 다 마시지 못한 채, D의 두 번째 잔이었던 야마자키 12년과 바꾸어 마셨다. 그 후 우리끼리 얘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또 다른 바텐더님이 우리 앞에 서 있었다.

"테킬라는 괜찮으세요? 매니저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술이에요."
아, 우리에게 어미새처럼 많은 가르침을 주었던 바텐더님은 이 바의 매니저님이었다. 우리와 얘기를 나누는 새로운 분은 지난번에 봤던 분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저는 테킬라를 좋아하는데, 이 친구는 테킬라는 별로 안 좋아해요. 대신 럼을 좋아해요."
"럼을 좋아한다니, 흔치 않네요."

매니저님도 그렇게 말했었다. 럼을 좋아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게다가 럼을 좋아하는 여자라면 더더욱.

그 후 사실상 이곳에 온 목적이었던 안주를 심사숙고하며 골랐다. 처음 왔을 때 먹었던 차돌 까르보나라에 한 입에 반해버렸으나, 불고기 깔조네라는 메뉴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불고기 깔조네가 완성된 이후, 아까의 바텐더님이 안주를 둘로 나누어주며 말했다.

"사실 깔조네보다는 파스타가 더 맛있어요."

정말 그의 말대로 깔조네를 먹어보니 파스타가 더 맛있었다.
"아, 정말 까르보나라가 더 맛있네요. 그걸 한 번 더 먹을걸.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셰프님이 8월까지만 근무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에 서운한 투로 말했다.

"괜찮아요. 아직 8월은 많이 남았잖아요. 다음에 까르보나라 드세요."

그것 때문이었다. 다음에도 또, 이곳을 방문했던 바로 그 이유. 셰프님이 떠나기 전에 차돌 까르보나라를 한 번 더 먹기 위해서였다. 물론 칵테일도, 위스키 라인업도, 다른 스피릿도, 바텐딩도 모두 훌륭한 바였지만, 당시 내가 그곳을 다시 찾았던 첫 번째 이유는 차돌 까르보나라 때문이었다. '8월까지'라는 절판 마케팅은 마음에 각인되기에 충분했다.

마지막 잔은 제임스 본드가 즐겨 마셨다는 보드카 티니(보드카 마티니)였다.

"이건 맛이 있어 마시는 칵테일은 아니에요. 소주 잘 드세요?"
"아니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술이 소주인데요. 그래도 오늘은 한 번 마셔보고 싶어요."
"오늘 많이 힘드셨나 봐요."

영화에서 나온 칵테일이라 궁금해서 시킨 이유도 있었지만, 매니저님의 말이 옳았다. 정말 스트레스받을 때는 맛이 없더라도 도수 높은 술이 마시고 싶어 지는 법이다.

매니저님의 경고처럼, 보드카 마티니는 정말 맛이 없었다. 그 이후 내가 그 칵테일을 다시 마신 적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이곳이 좋은 이유 3가지를 발견했다.

"안주, 의자, 칵테일이 좋아요."
"의자요?"
"너무 안락해서 카우치 포테이토가 될 것 같아요." 라며 웃었다.

세 가지 이유 중 하나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단지 두 번째 방문했음에도 친구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썼던 글의 제목을 보면 내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던 것 같다.

'Bar C, 단골이 될락 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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