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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티하이커 Nov 11. 2017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지난 번에 썼던 글(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는 달리, 이번에는 ‘미술관’의 관점에서 적어보고자 한다.



메트는 둘로 나눠서 써야 할 만큼 뉴욕의 다른 미술관들보다 소장품이 훨씬 방대하다.


피아노 치는 소녀들, 오귀스트 르누아르, 1892

첫 그림은 르누아르의 유명한 그림, <피아노 치는 소녀들>이다. 원래 오르셰 미술관의 그림이라는데, 대여한건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었다.

마치 파스텔화 같은 섬세하고 따뜻한 여성적인 필체가 눈에 띈다. 메트에서 이 그림을 본 순간, ‘어디서 보았는데’ 라는 기시감이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바로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봤던 비슷한 느낌의 다른 그림 때문이었다.


피아노 치는 이본과 크리스틴 르롤, 오귀스트 르누아르

이 그림은 위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을 위한 습작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피아노 치는 소녀들>보다 크기가 작다. 그림의 주인공인 두 여인의 연령대는 <피아노 치는 소녀들>보다 확연히 높아보인다. 붉은 옷을 입은 여자는 피아노를 치고 있는 흰 옷을 입은 여자의 피아노 교사 같기도 하다.


Sails at Chatou, Maurice de Vlaminck, 1906

투박하고 직선적인 붓터치, 특히 푸른색 계열과 잘 어울리는 듯한 모리스드 블라맹크의 그림이다. 이번 여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 특별전으로 그의 그림이 초대되기도 했다.


Sails Boat at Chatou, Maurice de Vlaminck, 1905

몇달 전, 한가람미술관에 대여됐던 그림으로, 메트의 <Sails at Chatou>보다 1년 먼저 제작된 그림이다. <Sails at Chatou>보다 한층 더 밝은 분위기로, 요트가 중심에 위치해 항해를 하는 느낌이 좀더 두드러진다. 반면, <Sails at Chatou>는 관망하는 듯하며, 한편으로는 외로움이 느껴진다.


그랑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위한 습작, 조르주 쇠라, 1884

점묘법의 창시자 쇠라가 그랑자트 섬을 그린 그림이다. 처음에는 <Study for “A Sunday on La Grande Jatte”>라는 제목을 지나쳤을 때, 그 유명한 ‘그랑 자트섬의 오후’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그림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기억 속의 그랑 자트 섬은 좀더 밝았다.


그랑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조르주 쇠라, 1886

시카고에 소장된, 습작이 아닌 완성작인 ‘그랑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이다. 역시 메트의 습작보다 명도도, 채도도 밝다. 완성작이 묘사하는 그랑 자트섬은 오후 한 시에서 두 시 사이 같지만, 습작의 시간은 오후 네 시 반쯤 되어 보인다.


브로글리 공주,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853

내가 생각하기에, 여성의 초상화를 가장 아름답게 그리는 화가인 ‘앵그르’의 <브로글리 공주의 초상>이다.

제작년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렸던 <앵그르부터 칸딘스키까지> 전시로 앵그르를 알게 되었다.


오달리스크,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814

그 후 루브르미술관에서 위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Grand Odalisque 를 보고, 그가 그려낸 관능미에 감탄했다.



<브로글리 공주>는 관능적이기보다는 우아하다. 특히 손에 잡힐 듯한 스커트의 주름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오송빌 백작부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845

몇일 뒤 내가 뉴욕에서 가장 사랑했던 미술관인 프릭 컬렉션에 갔을 때, 프릭 컬렉션의 얼굴인 앵그르의 <오송빌 백작부인>을 감상할 수 있었다.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의 초상화라는 점에서, 매트의 <브로글리 공주>와 닮아있다. 그러나 오송빌 백작부인은 나이는 어려보여도 도발하는 듯한 눈빛을 지녔다. 그녀의 관능미는 ‘브로글리 공주’와 ‘오달리스크’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Landscape with Ducks, Charles-Francois Daubigny, 1872

도비니의 오리를 그린 풍경화. 나는 풍경화를 좋아한다. 잔잔하면서도 고요한 호수의 전원 풍경이 서정적으로 담겼다.



자세히 보면, 좌측 하단에 수영하는 오리 가족과 뭍가에서 쉬고 있는 오리 세 마리가 보인다. 낭만적인 노을이 가득한, 해가 저무는 저녁 풍경이 좋다.



도쿄 국립서양미술관 조각공원에서 만났던 로댕의 <칼레의 시민>을 뉴욕 메트에서도 만났다.

https://brunch.co.kr/@cityhiker/103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 앙투안 부르델

부르델의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 역시 도쿄의 우에노를 방문했을 때, 국립서양미술관에서 만났던 작품이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파리 마욜 미술관에서 만났던 <사계> 시리즈의 여름의 여신 아닌가? 미술관은 역시 다닐수록 재미가 붙는다. 회화에서는 비교할 작품이 많아지고, 조각에서는 반가운 얼굴을 만나니까.



램브란트가 빛의 화가로 불린 까닭은 그가 어둠을 독보적으로 잘 그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The Eruption of Vesuvius, Johan Christian Dahl, 1924

다소 충격적인 비쥬얼이었던 베수비오스 화산에서 분출되는 용암. 노르웨이 화가인 요한 크리스티안 달의 그림이다. 내가 그곳에 서 있는듯한 생생한 현장감이 압도적이었다.


Copenhagen Harbor by Moonlight, Johan Christian Dahl, 1846

같은 작가의 그림으로, 코펜하겐 항구의 풍경을 그렸다. 같은 달빛을 그렸지만, 아래의 노스 케이프에 비치는 달빛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The North Cape by Moonlight, Peder Balke, 1848

마치 램브란트의 그림같은 환상적인 명암을 보여주는 노르웨이 화가 Peder Balke의 노스 케이프를 그린 그림이다. 노스 케이프는 북극에 가까운 노르웨이의 지명이라고 한다.

사진으로는 이 그림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지 않아 안타깝다. 처음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었다. 이 그림엔 심장을 멎게 하는 웅장함과 장엄한 메시지를 품고 있었다.


Woman with a Parrot, Gustave Courbet, 1866

내가 좋아하는 화가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쿠르베, 다비드, 마네를 좋아한다. 공교롭게도 모두 프랑스인이다) 쿠르베의 그림을 만나 반가웠다. 쿠르베는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가이지만, 위의 <여자와 앵무새>는 낭만주의에 가까워 보인다. 구도와 자세를 봤을 때, 그림 속 주인공은 회화보다는 만화 속 인물에 가까워 보였다.


Sleeping Nude, Gustave Courbet, 1858

<여자와 앵무새>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에서 감상했던 쿠르베의 또다른 그림, <잠자는 나부>가 떠올랐다.


도쿄에서 이 그림을 보았을 때, 그림 속 여자가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잠자는 나부>는 좀더 사실주의에 가깝고, <여인과 앵무새>는 낭만주의풍으로 보였다.


Still Life with Ham, Philippe Rousseau, 1870s

정말 먹음직스러웠던 필립 루소의 햄이 있는 정물. 실제 고기를 썰어놓은 듯하다. 몹시 배가 고파졌고, 하몽이 간절했다.


The Boulevard Montmartre on a Winter Morning, Camille Pissarro, 1897

겨울의 몽마르트 풍경을 그린 피사로의 그림.


Wheat Field with Cypresses, Vincent van Goch, 1889

반고흐의 <삼나무가 있는 밀밭>이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기시감이 느껴지더라니, 그 이유는 뾰족한 사이프러스 나무(삼나무) 때문이었다.


The Starry Night, Vincent van Gogh, 1889

불과 몇일 전, 모마에서 보았던 <별이 빛나는 밤>에도 이 삼나무가 등장했다. 위의 두 그림은 같은 해에 그려졌다. 반고흐가 귀가 잘린 뒤,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서 요양하던 시절 그려진 작품들이다. 삼나무는 지중해 지방에서 묘지에 많이 심어지는 ‘죽음’을 의미하는 나무라고 한다. 삼나무가 상징하는게 무엇인지, 그 후 반고흐의 생애가 어떻게 마감되었는지를 떠올리니 저 그림들이 구슬퍼보였다.


Oedipus and the Sphinx, Gustave Moreau, 1864

파리의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에서 봤던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소묘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완성작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뉴욕에 오기 전에 파리에 먼저 가길 잘했다.







뉴욕을 떠나는 마지막 날, 메트에 한 번 더 방문했다.



볼 때마다 웅장한 메트의 입구.

여러 번 가는 미술관으로는 메트가 딱이었다. 언제나 기부입장으로 원하는 만큼 입장료를 지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국에 왔는데 미국 회화를 봐야하지 않을까해서 아메리칸 윙을 찾아 헤맸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 1787

그러다가 우연히 발견한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미국 미술 갤러리인 아메리칸 윙으로 향하는 문 바로 옆에 이 작품이 있었다. 루브르에서, 아니 파리에서 가장 좋았던 그림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었는데,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너무 멋진 그림이었다. 두 번의 메트 방문에서 가장 좋았던 그림이었다.


The Public Viewing David’s “Coronation” at the Louvre, Louis Leopold Boilly, 1810

같은 갤러리에 있던 보일리의 재밌는 그림이다.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관람하는 관람객을 그렸는데, 내가 실제 루브르에서 체험한 것과 비슷했다.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자크 루이 다비드, 1807

루브르 미술관에서 만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은 정말 감격스러웠다. 생각보다 거대했고 웅장했다. 그림을 보고 감동해 눈물을 흘린 경험도 처음이었다. 그 감동을 남기고자 사진을 찍었으나, 관람객이 너무 많은 나머지 그들의 머리가 나오지 않게 찍으려니 그림 하단을 모두 날려버리고 말았다. 2017년의 루브르가 1810년의 루브르와 다른 점이 없는 것이 놀랍다.


The American School, Matthew Pratt, 1765

필라델피아 출신, 매튜 프래트의 <아메리카파>. 그의 스승인 런던 출신 화가 웨스트와 제자들을 그렸다.



그런데 제자가 들고 있는 화폭이 아이패드처럼 보이는건 기분 탓일까.

Watson and the Shark , John Singleton Copley, 1778

존 싱글턴 코플리의 대표작, <왓슨과 상어>이다. 왓슨은 실제 인물로, 상어의 습격을 받아 다리를 하나 잃었으나 후에 자수성가하여 런던 시장이 된 인물이다.


메두사 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 1819

루브르에서 본 대작, <메두사호의 뗏목>이 겹쳐지는 그림이었다.






루브르 미술관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규모이긴 하지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이에 뒤지지 않는 방대한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만약, 다음에 또 뉴욕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박물관보다 미술관에 집중하여 온종일 그림을 보고 싶다.






Kathie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공간 그 자체에 대한 글을 씁니다. 감성에세이 <솔직하지 못해서>를 썼고, 여행에세이 <예술과 술의 도시, 뉴욕>, 술에세이 <바에서 쓰는 일기>를 연재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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