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집이 생기지 않는 상처
스물아홉 살. 동네 피부과에서 지루성 피부염이라며 약과 연고를 처방해줬다. 그 연고는 상처에 바르는 새끼손가락 크기의 연고였다. 가끔 바른다고 발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 써버렸다. 마침 회사 근처에 큰 피부과가 있었고, 동네 피부과에서 처방해준 연고보다 큰 대용량 연고를 처방해 줬다. 가끔씩만 바르라면서.
서른두 살. 간지럽고 붉게 올라왔을 때 발랐던 그 큰 연고를 다 썼다. 배고플 때 소리 내는 위장의 목소리처럼, 피부는 신경 쓰일만한 따가움과 간지러움을 느끼게 해줬다.
대용량 연고를 처방해준 피부과를 가는 건 너무 먼 거리. 공릉역에서 자취방까지의 지도만 기억하는 내 머리. 반항하는 내 피부를 위해 가까운 피부과를 검색해봤다. 공릉역에서 한 정거장 올라간 하계역에 피부과가 있었다.
남들보다 한 달이나 먼저 에어컨을 가동한 내 천국 같은 방에서 나가기가 싫었다. 창문만 열어도 밖의 온도를 느낄 수 있는 여름이었다. 그래도 나가야 했다. 내 피부를 위해서.
피부과에 도착해서 처음 온 환자들이 적는 손바닥 크기의 접수증을 적었고 기다렸다. 내 이름이 불렸고 한평 남짓한 진료실로 들어갔다.
너무 더웠다. 나에겐 찜질방과 같은 온도였다. 의사는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온도 때문인지, 기분 안 좋은 일이 있는지, 눈빛에는 환자를 대하는 친절함이 담겨있지 않았다. 심지어 왜 왔어 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차가웠고 짜증이 가득했다.
지루성 피부염이라 진단을 받았었고, 바르던 연고가 떨어져서 왔다고 했다. 두피가 가렵냐는 질문에 두피는 괜찮다고 했다. 모니터를 보며 "접촉성 피부염 같아요. 지루성 피부염이라고 하긴 좀 그래요"라고 말하면서 처방전에 적힐 약 이름을 치기 시작했다.
"끝난 건가요?"
"네"
바로 나왔다. 얼굴에선 더워서 흘리는 땀 반, 열 받아서 흘리는 땀 반 정도가 흐르고 있었다.
다음 날. 약을 챙기지 않은 채 교통카드를 찍고 역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집까지 걸어서 10분 거리. 안에 있는 안내소를 향해 양해를 구하러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뭐 좀 여쭤볼게요"
오른쪽. 내가 바라보며 말한 30대 후반 정도의 남자는 작지 않은 내 목소리를 듣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평온하게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나도 3초 정도 그 사람에게 내 시선을 고정했다.
왼쪽. 내가 한 마디 하려는 순간을 파악하고 50대쯤 되어 보이는 어르신 한 분이 어떤 걸 도와드릴까요 하며 응대해줬다. 그 순간조차도 오른쪽에 있던 남자는 왼손은 턱을 괴고 오른손은 마우스를 잡고 아까 내가 물어볼 때 그 모습 그대로 멈춰있었다.
신분증 같은 거 안 맡겨도 괜찮냐고 여쭤봤고, 괜찮다며 다녀오라는 어르신의 말에 약을 챙겨 다시 역으로 돌아왔다. 더워서 흘리는 땀 조금, 열 받아서 흘리는 땀 많이... 그렇게 난 땀을 흘렸다.
불친절한 무언의 온도에 타격을 먹어 빌빌대는 하루였다.
상대를 대하는 태도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을 받는다. 친절하라고 교육을 받는다. 모두에게 친절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를 응대하는 자리에서만큼은 친절할 것을 여러 곳에서 교육받는다.
불친절함은 교육받지 않는다. 본능적 감정 표현이라고 해야 할 만큼 즉흥적이고, 부정적인 상황에서 자주 나타난다. 그렇기에 만들어지지 않은 순수함을 기준으로 볼 땐, 불친절한 태도는 순수한 행동에 가깝다.
그런 순수함을 떠나 나는 친절함을 원한다. 단순히 그게 더 기분이 좋아서, 응대하는 직군의 올바른 방식이라서가 아니라, 감정의 온도 그 따뜻함을 느껴봤기 때문에 친절을 원하고 바라게 된다.
사람은 내성을 가지고 있다. 생물학적 내성만이 아닌, 감정적 내성도 가지고 있다. 감정적으로 어떤 상처를 받으면 같은 방식의 감정적 상처를 다시 받을 때, 아픔이 조금씩 줄어들고 맷집이 생긴다.
그중 유독 맷집이 생기지 않는 것이 있다.
무시
불친절함까지는 어떻게 견딜 수 있겠지만, 불친절함을 넘어서서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행동들이 있다. 예전에는 간혹 보이는 특정 상황들이었지만, 요새는 빈번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개인주의의 삶을 추구하는 시대. 그 안에 내포된 무시들. 나를 지키는 행동과 타인을 거부하는 행동의 경계선이 흐려졌고 그래서 보이지 않는다.
분명한 경계선이 존재해야 하는 부분들은 그 선이 흐려지고 있다. 함께 공존해야 하는 것들에는 선이 그어지고 있다. 해야 할 것은 안 하고, 안 해야 할 것은 하고 있다.
맷집이 생겨 그러려니 넘어가는 사람들의 스트레스 관리가 부러우면서도, 맷집으로 인해 이전에 받았던 아픔을 잊고 그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진 않을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