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통건축에 도랑주라는 기둥이 있다. 기둥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둥글거나 모나게 만든 기둥이 대부분이다. 도랑주는 나무가 가진 원래 모양 그대로 사람의 손을 거의 대지 않은 울퉁불퉁한 형태의 기둥이다. 경기도 안성에 있는 청룡사 대웅전이나, 충남 서산에 있는 개심사 심검당의 기둥이 도랑주의 좋은 예다. 중력의 지배를 받는 건축물에 상부의 무게를 지탱해야 하는 기둥으로 구불구불한 나무를 쓰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구조역학을 치밀하게 계산하지 않고 그저 목수의 오랜 경험에 따라 세웠을 터이다. 기술 공학자들이 보기에 좀 불안해 보이기는 해도 수백 년을 버티고 있으니 구조공학적인 문제는 크게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청룡사 대웅전)
이런 건축은 주로 조선 후기의 불교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더구나 유교가 한층 보수화된 조선 후기에 불교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큰 전쟁을 치르는 동안 국가 살림살이가 파탄 지경이었을 터이니, 불교는 국가 지원은 커녕 일반 백성들로부터 시주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니 난리 통에 허물어져가던 사찰을 손보고자 하여도 제대로 된 목재 하나 구하기 힘들었지 않았을까.
당시 불교 사찰의 재정 형편은 결코 윤택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찰이 산간에 은둔하였고 유력한 시주층은 확보하지도 못하였다. 농민이나 상인을 새로운 시주층으로 확보했다고는 하지만 이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재정지원은 한정된 것이었다. 결국 하나의 불전을 건립하는 데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다른 건물에서 헌 재목을 뜯어다가 억지로 끼워 맞추기도 하고 때로는 본래 의도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임시변통으로 부재들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김동욱, <한국 건축의 역사>, 2010, 273쪽)
온 나라가 전쟁터였으니 많은 산림이 훼손되고, 나무가 주요 에너지원이어서 조선 후기에 이르면 산에는 쓸 만한 나무가 귀했을 터이다. 더구나 궁궐에 쓸 목재를 확보하기 위해 역대 왕조가 금산 정책을 폈기에 제대로 된 나무는 잘라다 쓸 권한도 없었다. 그나마 쓸만하다 싶은 나무는 세도가문이 다 가져다 쓰던 시절이니 힘없는 사찰은 구불구불한 나무나 오래된 건물에서 건진 자재뿐이었다. 이 시기에 보수된 불교 사찰을 보노라면 궁핍한 절간의 살림살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개심사 심검당)
여기서 나는 우리 선대 목수들의 장인 정신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열악한 재정과 부족한 건축 여건 속에서도 뛰어난 예술혼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주어진 여건에서 미적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다. 시대적 상황이 독특한 건축형태를 낳았다. 기둥으로 쓰이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구불거리는 나무가 독특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이런 고졸한 건축미를 극찬하는 현대 건축가들이 적지 않다.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장자> 인간세 편)은 이런 경우에 적용하라고 있나 보다.
휜 나무는 기둥이나 대들보감이 못 된다는 생각은 서양문물의 효율 중심적인 가치관이 들어온 이후에 생긴 것이다. 한국의 전통건축에서는 뒤틀리고 휜 나무를 그대로 기둥과 대들보로 사용한 경우가 많다. 한국의 기둥은 곧은 놈은 곧은 대로, 휜 놈은 휜 대로 편견이나 차별 없이 다 제 몫을 할 수 있다는 기막힌 평등사상을 담고 있다. (임석재, <우리 건축 서양 건축 함께 읽기>, 2011, 52쪽)
이쯤 되면 찬탄을 넘어 견강부회(牽强附會)나 침소봉대(針小棒大)로 까지 비칠 수도 있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세상 만물은 저마다의 쓰임이 있다는 말이다. 다만 제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자리에 있을 뿐이다. 세상 만물은 쓸모 있고 없고의 잣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쓰이고 있느냐 없느냐로 보아야 할 문제다. 편협된 시각이나 일방적인 기준으로 그 쓰임을 제멋대로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인생도 이런 것 아닐까? 재능 없는 사람은 없다. 쓸모없는 사람도 없다. 각자의 재능이 다를 뿐이고, 쓰임이 다를 뿐이다. 누구나 삶의 과정에는 어려운 시기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쓰일 곳과 때가 맞지 않아서 그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