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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인생 Sep 28. 2020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랴?

송양지인(宋襄之仁)

중국 춘추시대에는 주나라 천자가 명분상 천하의 주인이었지만 실권이 없었다.  
이때 수많은 제후국들이 난립하여 패권을 다투었다.  

이 중 가장 힘센 제후국이 주나라 천자를 대신하여 천하의 질서를 좌우하던 경찰국가였다.  

이 시기에 차례로 5개의 패권 제후국이 등장하였는데, 이를 '춘추오패'라 부른다.  

당시 제후국중 하나인 송나라에 양공이라는 제후가 있었다.  

그는 패권 제후가 되려던 욕심에 이웃한 약소국가를 건드리게 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약소국가는 당시 떠오르는 강대국 초나라의 혈맹이었다.  

의리를 최고의 가치로 치던 시대였으니 초나라가 대신 복수하려고 송나라에 쳐들어 갔다.  

국경을 가르던 강을 건너 초나라 군대가 몰려온다는 보고를 받고 한 똘똘한 송나라 참모가 송양공에게 충언을 했다.  

적군이 허겁지겁 강을 건너고 있으니, 지금 맹공을 퍼부으면 제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제압할 수 있다고.

하지만 군자를 자처하던 송양공이 아무리 전쟁이라 해도 그건 도리가 아니라고 묵살했다.  

군자는 남의 약점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이러는 사이에 초나라 군사들은 강을 건너 전열을 정비하자, 그 참모가 다시 간곡히 고했다.  

적군이 전열을 채 갖추지 못한 지금이야 말로 마지막 기회니 맹공을 퍼부으라고.  

송양공은 이 때도 군자의 도리를 들먹이며 참모의 간언을 묵살하고 공격하지 않는다.  

아 답답하다.  

초나라 군대가 마침내 진을 치고 전투 준비를 마치자 송양공은 비로소 공격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강력한 초나라 군대는 송나라 군대를 묵사발로 만들었다.  

송양공이 때늦은 후회를 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이때의 일을 빗댄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있다.  


송양지인(宋襄之仁)
송(宋)나라 양공(襄公)의 인(仁)이란 말이다.
쓸데없이 인정을 베푼다는 뜻으로, 불필요하게 동정이나 배려를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말한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몹시 어리석어 보이는 송양공의 행실이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이렇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또 하나, 과연 송양공의 태도가 어리석다고만 할 수 있을까?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 같은 상황에 자주 직면한다.

절친한 동료에게 의리상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승진기회.

참여하고 싶었지만 끗발에 밀려 포기한 프로젝트.

위아래 사람의 날짜 맞추느라 가지 못했던 휴가.  

우연히 참석한 모임이었지만 분위기에 밀려 낼 수밖에 없었던 밥값.

  

군자의 길을 자처하는 송양공 같지만은 않기에 우리로선 깊은 내면적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런 태도로 살면, 결과만 평가하는 성과사회에서 낙오자가 되기 십상이다.

좀 더 뻔뻔하게 처신할 걸.  

눈 딱 감고 부딪쳐 볼걸.

모른 체 밀어붙여볼 걸.

그땐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나 지나고 나면 다 잊어버리는 게 우리 사회 아닌가.  


그런데,  

지나고 보니, 어리석었을지 모르지만 부끄럽진 않다.  

지금의 내 모습이 그리 처량하게만 보이지 않으니.

또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인지도 모르니.  

세월이 흘러 후대에 공자도 송양공을 칭송했다지 않는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군자의 도를 버리지 않았다고...  

뭐 그렇다고 내가 군자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내 마음은 야누스의 얼굴 같다. 내 아이들은 부디 이렇게 살지 않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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