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과 삶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급 인생 Oct 12. 2020

보고서의 쓸모

하급 직원의 생존수단?

  직장 생활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화두가 보고서 작성이다. '바쁜데 말로 하면 되지 굳이 시간 들여 보고서를 써야 할까?', '실속도 없이 보고서만 번지르르하면 뭐하나?', '글빨 좋은 사람들만 회사에서 잘 나가는 거 아냐?', '요즘 잘 나가는 기업들은 보고서 점점 없다는데 우 회사는 너무 구시대적인 거 아냐?' 직장에 들어가면서부터 이런 불평들이 하게 된다. 


  누구나 귀찮고 힘들어하면서도 왜 아직도 대다수 조직에서 보고서를 고집할까? 보고서를 중시하는 회사에 다니는 나도 초짜 시절 보고서를 작성할 때마다 쩔쩔다. 내가 작성한 보고서를 상사에게 설명할 때마다 자괴감이 들곤 했다. 보고서 내용보다 보고서 자체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글솜씨가 형편없는 것 같기도 하고, 기획능력 자체가 없는 것 같은 낭패감을 많이 느꼈다. 나름 열심히 작성한 보고서를 지적당할 때는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하지만 연차가 늘어갈수록 또 책임질 일이 많아질수록 보고서의 위력을 점점 실감하게 되었다. 오늘도 보고서 작성에 애를 먹고 있는 직장인들을 위해 보고서를 잘 쓰면 어떤 이익이 있는지, 보고서의 쓰임새는 무엇인지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얘기해 보고자 한다.




1. 보고서는 나와 내 능력을 보여주는 홍보수단이다.


  큰 조직일수록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근무하지않는다. 자기 부서를 중심으로 관련 는 부서가 아니면 하루 종일 얼굴 한 번 못 보고 퇴근하는 날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저 위에 계신 분을 만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다. 또 만난다고 하더라도 말 한마디 붙이지도 못할뿐더러 그분이 내게 관심 조차 없다. 조직에서 내 존재감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어느 세월에 조직 내 실권자의 눈에 들어 승진할 수 있을까? 뒷배가 없다면 결국은 일을 통해 가까이 가는 밖에 없다. 중요한 의사결정이 따르는 일수록 높은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통로다. 하지만 하급 직원이 중요한 일 하나 맡았다고 업무수첩 하나 달랑 들고 가서 자기의 생각을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보고해야 하는데, 그때 필요한 것이 보고서다. 의사결정자는 보고 내용만 보고 듣는 게 아니다. 보고자의 기획능력, 논리력, 글솜씨, 보고 태도 등도 함께 파악하게 된다. 이때 흡족한 보고를 받게 되면 그 사람의 인적사항이 궁금해지고, 은연중에 중요한 사안을 맡길 만한 능력자의 범주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의사결정자의 기억에 들어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여부는 조직에서 그 사람의 가치를 말해준다. 그러니 보고서가 얼마나 중요하겠나? 조직에서 뒷배 없는 나를 알리는 가장 정당하고 합리적인 수단이 보고서다.


2. 보고서는 막연한 생각을 명료하게 만드는 마술 지팡이다.


  어떤 사안이든 머리에 들어 있 아이디어 원석에 불과하다. 보석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깎아내고 정제해야 한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은 불투명했던 생각이 보다 명료해지고 논리성 부여 과정이다. 막연하게 생각하는 단계에서 글이나 도표 등으로 가시화하는 과정이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할 때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글이나 도표, 그림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의도하는 바가 명확하게 확인된다. 또 어느 부분이 비논리적이고 비현실적인지 스스로 깨닫게 된다. 눈으로 본다는 것이 우리의 사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기도 하고 참고자료들을 검토하면서 미처 생지 못했던 부분을 보완하는 절차도 반드시 거다. 그러다 보면 애초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가 생성되는 현상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점차 자신감과 확신을 갖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머리가 아니라 직접 글과 도표 등으로 표현해 보아야 일어나는 현상임을 경험해본 사람만 이해한다.


3. 보고서는 나와 조직이 만든 노하우이다.


  글로 된 모든 기록물은 사료와 같다. 어떤 일의 발단과 전개과정, 그리고 최종 의사결정까지의 전 과정을 보고서가 아니면 어떻게 오랫동안 기억하고 저장해 놓을 수가 있겠는가? 이런 기록물들은 조직의 역사를 담은 기초 사료이다. 보고서 하나하나를 모아 데이터베이스화 하면 그 조직만의 경험과 노하우가 형성된다. 더 중요한 것은 작성자 개인의 능력 향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시간과 정열을 쏟아붓고 몰입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 사안에 대해 잘 알게 된다. 누가 뭐래도 그 분야에 관한 한 최고 전문가가 되어 간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보고서 작성 경험을 토대로 전문분야 저술활동을 하기도 한다. 보고서 자체는 조직의 것이지만 그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생긴 느낌, 경험, 깨달음 등의 보이지 않는 노하우는 오롯이 작성자의 것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내가 보고서 만능주의자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모든 사안을 보고서로 작성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중요한 의사결정이나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할 사안에 국한된 얘기이다. 긴급한 사안, 경미한 사안들까지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바보짓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중요한 일이지만 보고서 작성 자체를 하지 않아야 하는 때도 있다. 말하자면 그 일을 완성시키기 위해 윗선을 비롯해 관계자들을 충분히 설득해야 하는 경우에 보고서를 공들여 써보자는 취지다. 실무자급 직원에게는 보고서가 조직 내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알리는 동시에 본인의 능력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되는 사례를 주변에서 많이 보았다. 심지어 보고서 잘 써서 승승장구한 예도 심심찮게 보았다. 힘들고 짜증 나는 보고서 작성, 부정적인 면도 많지만 개인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유효한 도구가 될 수도 있으니 적절하게 활용해보자. 특히 보고서를 중요시하는 공공 조직에선 보고서가 업무의 시작이자 끝이다. 잘 쓴 보고서 하나가 개인의 앞길을 밝히는 횃불이 될 수도 있기에 써보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