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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과 삶

나는 회식이 너무 싫었다.

by B급 인생

1분 스피치 타임


회사에서 힘든 순간 중의 하나는 회식 때의 ‘1분 스피치 타임’이었다. 참석자가 돌아가면서 허심탄회하게 발언하라고 배려하는 시간이긴 하지만 나에겐 매번 큰 근심거리였다. 특별히 정해진 형식이나 방향 같은 건 없지만 맨날 보는 사람들끼리 뭘 말하라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됐다. 게다가 발언 말미에 멋있는 건배사로 마무리 지어야 해서 숫기 없는 나로선 분위기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주로 좌장 격인 직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 시켜서 하는 게 대부분이다. 휘하의 직원들에게 평소에 말하기 곤란하였던 건의사항 같은 걸 해보라는 취지이지만, 그 건의를 100% 들어주리라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아랫사람 입장에선 그 발언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강요이며 갑질로 여겨질 수 있다.


나처럼 소극적이거나 내성적인 성격의 직원들에겐 여러 사람 앞에서 하는 발언은 늘 고역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더라도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에 머리가 온통 하얘져 조리도 없이 횡설수설하게 된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미리 생각해보느라 앞사람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할 정도다. 고민 고민하며 어렵사리 해야 할 말을 마련해두었더라도 앞의 누군가가 유사한 발언을 해버리면 정말 난감하다. 비슷한 발언을 되풀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말을 다시 마련해둘 겨를도 부족하니 더 움츠려 든다.


게다가 경험에 의하면 내가 발언하는 동안 다들 끼리끼리 수군대다가 내 말이 끝나면 내용도 모르면서 박수만 쳐대기 일쑤니 모욕적이기도 했다. 그러니 좀 튀고 싶은 사람은 모두가 집중할 수 있도록 발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좌중을 웃기는 유머나 최신 정보 등 누구에게나 솔깃한 발언을 하는 게 좋다. 거기에다 마지막에 내지르는 새롭고 창의적인 건배사를 미리 준비해두면 금상첨화다. 그야말로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분위기를 띄우는 효과를 보게 된다. 이런 자질과는 거리가 먼 나로선 회식을 한다는 전달사항을 보는 순간부터 마음이 무거워지곤 했다.




원샷 건배


또 하나 힘든 순간은 건배 타임이다. 지위 고하, 남녀 불문하고 누군가의 건배제의에 따라 '원샷'을 해야 하는 우리의 회식 문화 때문에 술이 약한 나는 늘 괴로웠다. 특히 직위가 높은 사람의 건배제의를 거부하다가는 '주도(酒道)'도 모르는 버릇없는 놈으로 혼나기도 한다. 심한 경우 술 따위도 못 마시니 어려운 업무를 헤쳐나갈 수 없는 무능력한 놈으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한 때 회식자리에서 폭탄주가 유행했던 시절, 나는 승진을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절망적이기도 했다.


그래도 회사 경력이 쌓이면서 회식자리에서 나만의 대처능력도 생겼다. 회식 때마다 미리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식탁 아래 숨겨둔 빈 잔에 내 몫의 술을 몰래 비워내곤 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자신이 격의 없는 사람임을 보여주려는 듯,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옮겨 다니는 상사가 있다. 내 옆으로 다가와 내 주량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술잔을 건네주며 술을 따라줄 땐 어쩔 도리 없이 단숨에 받아 마셔야 한다. 얼굴엔 성은이 망극하다는 표정과 함께 최대한 호쾌한 동작으로 원샷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여러 사람의 입을 거쳐 불결하리라 생각이 드는 술잔은 둘째로 하더라도, 내 곁에 머물다 가는 상사와 선배들의 잔을 모두 받아 마시다 회식이 파하기도 전에 인사불성이 되곤 했다.


더 큰 문제는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도 모르게 곯아떨어져 있다 다음날 출근하면 여전히 취중 상태로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업무를 제대로 할 수 없을뿐더러, 체력이 약하다는 둥 정신력이 약하다는 둥 온갖 수모도 다 겪으며 하루를 버텨야 한다. 지금도 그 끔찍한 시절을 회상하면 천금을 준다 해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상사 배웅


술자리가 파할 무렵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이미 고주망태가 되어 정신도 혼미하고 몸도 가누기 힘든 상태에서 윗 분들이 떠날 때까지 자리에서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지위가 높은 상사부터 차하위 상사가 차례차례 떠날 때까지 직급이 낮은 직원들이 예의 바르게 배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사들은 어쩌면 하나같이 이별 인사를 하면서 한 사람의 참석자도 빼지 않고 작별 악수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예의 바른 사람으로 보이려면 최대한 꼿꼿하게 버텨야 한다. 모든 상사를 그렇게 배웅하려면 그 시간도 꽤나 오래 걸린다. 인사고과로 직원들을 좌지우지하는 조직사회니 어쩔 수 없다.


모든 상사를 배웅했다고 끝이 아니다. 운수가 나쁜 날은 개중에 자신이 호탕하고 자상하다는 듯 한잔 더 사겠다고 하는 사람이 꼭 나타나기 마련이다. 빨리 집에 돌아가 쉬고 싶은데 다시 한참 동안 취한 상사를 모셔야 하니 마음이 털썩 내려앉는다. 그렇다고 내색할 순 없다. 반대로 환호성과 함께 과장된 감사의 액션을 보여주는 게 예의다. 그렇게 한잔 더하고 파하면 다행이지만, 하급직원들의 불행은 여기까지가 아니다. 그 상사가 인사불성이 되기라도 하면 술값은 고사하고 기사에게 택시비까지 쥐어주며 보내드려야 한다. 심한 경우 그 상사의 집까지 고이 모셔서 가족에게 인계해 드려야 뒤탈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러려고 취직했나 자괴감이 든 적도 많다.




근자에는 코로나 사태로 회식이 거의 근절되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그동안 미뤄두었던 회식이 조금씩 다시 살아나겠지만, 예전처럼 그런 분위기로 흘러가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더구나 몇 년 전부터 김영란 법 제정, 직장 내 갑질 문제, 성희롱 문제 등으로 막 망가져(?) 보자는 식의 회식은 자제하고 있는 추세다. 갓 입사한 90년대생의 후배 직원들은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프라이버시를 한층 존중하는 세대이니 회식 자체를 강요할 순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회식이 두려운 나로선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이제 회식자리에서 누굴 접대하여야 할 위치도 아니니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다.


직장생활로 고단할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회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즐겁자고 하는 회식이 공포스럽거나 짜증 나는 만남으로 여겨졌던 내 젊은 날의 회식문화는 나의 세대에서 마감되면 좋겠다. 하긴 내 또래 세대 중에도 사람 만나길 좋아하고 술을 즐기는 사람도 꽤 있으니 꼭 내 말이 맞다고는 장담 못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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