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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인생 Nov 02. 2020

과학책도 재미있구나.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2018)>을 읽고

  어느 회사에서나 자주 벌어지는 일로 얘기를 시작해 보겠다. 무슨 사안이 발생하면 대책회의를 하는 게 보통이다. 이때 리더가 좀 트였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브레인스토밍'을 하자고 제안한다. 한데 막상 회의를 하게 되면 쭈볏쭈볏 먼저 나서는 사람이 없다. 분위기 깨지 않으려고 눈치 빠른 고참 직원이 먼저 나서긴 하지만, 직원들의 후속 발언은 기대하기 어렵다. 할 수 없이 리더가 돌아가며 의견을 제시하라고 시킨다. 이 때는 먼저 발언하는 사람이 속편할 수 있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자기 의견을 생각하는 동안 꽤나 조마조마해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앞선 발언자가 내가 생각해 둔 의견을 먼저 말해버리면 무척 착잡해지기도 한다. 아무튼 돌아가며 의견을 내봐도 도통 반응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로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한다는 게 자칫 비난의 말로 비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이의 동조가 없으면 자신만 뻘쭘해 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회의는 결국 의미 없는 시간으로 흘러가기 십상이다. 브레인스토밍의 취지가 무색해진다.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회의 풍경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회의 중간에 잠시 휴식시간이 주어지면 각자 커피 한 잔씩 홀짝이며 슬금슬금 속내를 드러낸다. 끼리끼리 수군댄다. 좀 더 지나면 자기만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제시하기도 한다. 회의실이 아닌 복도나 휴게실에서 진짜 브레인스토밍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게다가 회의가 끝나고 뒤풀이로 술판이라도 벌어지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야말로 불꽃 튀는 토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딱딱한 공식회의 석상이 아니라 부담 없는 비공식 자리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놀이를 원하는 우리 뇌 때문에 그런 거란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회의를 이런 커피 브레이크 분위기로 만들어 진행하는 게 인기라는데 '오픈 스페이스 테크놀로지'라고 부른단다.  




 또 다른 얘기 더 해보자. 바나나를 장대 끝에 매달고 이틀 정도 굶긴 원숭이 네 마리가 있는 우리 안에 넣었다. 원숭이 두 마리가 장대위로 미친 듯이 기어올라가겠지. 하지만 바나나를 따려는 순간 물대포를 쏘아 방해했다. 원숭이는 물을 몹시 싫어해서 두 원숭이는 먹고 싶은 바나나를 포기하고 황급히 내려왔겠지. 그 이후로 네 마리 중 아무도 바나나를 따먹으려 시도조차 하지 않더란다. 둘째 날,  원숭이 두 마리를 밖으로 빼내고 이틀 굶긴 신참 원숭이 두 마리를 들여보냈다. 신참 원숭이들 역시 바나나를 따러 장대위로 미친 듯이 올라 가려했다. 그때 첫날부터 있던 원숭이들이 기겁하며 새로 들어온 원숭이들을 끌어내렸다고 한다. 다음 날, 첫날 들어온 원숭이 두 마리마저 우리 밖으로 꺼내고, 대신 또 다른 신참 원숭이 두 마리를 굶긴 후 들여보냈다. 새로 들어온 원숭이들 역시 바나나를 따러 올라가려는데, 둘째 날 들어왔던 원숭이들이 못 올라가게 말리더란다. 이번엔 물대포 아예 치는데도 말이다. 자신들은 올라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모르면서 신참 원숭이를 제지하더란다. 이 실험을 며칠간 반복해도 이 행태가 지속됐다고 한다.


  실험자는 사람이라고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사람도 앞선 사람이 한 행위를 이유 불문하고 반복한다고 추론했다. 말하자면 관행이라는 이유로, 다들 그렇게 하니까, 나만 튀는 행동을 하기 민망하니까 등 갖가지 이유로 하던 대로 한다고 한다. 어제 배운 지식, 사고방식, 습관, 고정관념을 오늘의 문제에도, 내일의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해 해결코자 한다.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시간이 지날수록 이유도 모르면서 선배사원이 하는 대로 답습하는 걸 많이 본다. 첨엔 이유를 물었겠지만, 우리 회사는 원래 그렇게 한다는 대답만 들을 뿐이다. 또 신입 주제에 별나게 굴어봐야 초장부터 찍히기만 할 뿐이다. 혁신이 일어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변화를 싫어하는 우리 뇌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의 <열두 발자국>에 이런 깨소금 같은 얘기들이 풍성하게 담겨있다. 뇌과학자니까 뇌과학, 신경과학, 행동심리학 쪽의 지식들을 많이 소개한다. 그 지식들을 동원해 우리의 일상생활을 들여다본다. 무심코 하는 우리의 행동에 대해 뇌과학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그치면 이 책은 심심할 게다. 이 지식들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 삶에 대해 조곤조곤 얘기해 주는 게 이 책의 진가다. 나를 돌아보게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뻔한 처세 얘기인데도 첨단과학으로 포장하니 꽤나 고급진 내용으로 읽힌다.


  나로선 정교수가 알쓸신잡에 나왔던 출연자 중 제일 호감이 갔던 사람이다. 조용조용 말하면서도 자기 의견을 다 말하는 사람이다.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자기주장을 끝까지 펼친다. 말발 센 유시민 작가도 논쟁을 붙었다 결국 설득당하는 장면을 여러 번 봤다. 말하자면 소리 없이 강한 존재다. 내공이 무지하게 깊은 사람으로 보인다. 이과 출신이라 얕잡아 보면 안 된다. 인문적 소양이 문과 출신 못지않다. 학창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었단다. 그러면 그렇지. 말 잘하고 글 잘 쓰고 박학하고 다식하고. 우리 같은 보통사람을 기죽게 하는 사람이다. 선한 인상이라 사람 좋아 보이는데, 공부만 죽자살자 한 '범생이' 마냥 답답하게 보이진 않는다. 사람이 좋다 보니 그의 책도 괜찮게 느껴지는데, 착시효과만은 아닐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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