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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인생 Jan 28. 2021

최선을 다했다고?

학창 시절 시험기간이면 으레 나타나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시험공부에 돌입하기로 맘먹은 첫날, 아침에 눈을 뜨면 '일단 든든하게 먹고 시작해야지' 하고 시동을 겁니다.

하지만 아침을 먹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소화를 조금 시킨 다음에 해야겠다'는 그러움이 생깁니다.

인터넷 뒤적이거나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쉬다 보면 점심때가 가까워집니다.

잠깐었던 것 같은데 그럴 때는 시간이 왜 그렇게 빨리 흐르는지 모르겠습니다.

불행은 여기에서부터 싹이 틉니다.

'에잇! 이렇게 된 거 오전은 쉬고 점심 먹고 본격적으로 해' 하 여유를 부립니다.

앞으로 남은 날을 감안하면 반나절 정도의 허비는 우습게 여기는 거지요.

그러나 점심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어폰을 귀에 고 음악을 들으며 커피 한잔 마시다 보면 식곤증이 밀려옵니다.


"딱 10분만 눈 좀 붙여야겠다"


소파에 기대 비몽사몽 간을 헤매다가 어느 순간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뜹니다.


"아니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내가 그렇게 곤하게 잤나?"


흘러간 시간이 아기도 하면서 부스스한 상태에서 품만 연신 해댑니다.

그래도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을 걸 보니 저녁을 먹으려면 두어 시간이 남아 다소 안도감이 듭니다.

마침내 책상 앞에 앉아 봅니다.

거창하게 세워둔 시험공부 계획표를 훑어보느라 한없이 시간이 또 지나갑니다.

저녁 땅거미가 밀려올 즈음다시 핑계가 생깁니다.


"배고프니 저녁 먹고 진짜 본격적으로 시작해야겠다"

 

하지막 저녁을 거나하게 먹고 나 또 해집니다. 


"소화시킬 겸 산책이나 하고 시작해야지"


산책하고 씻고 나서 책상에 앉으면 노골노골 졸립습니다.

낮에 그렇게 잤는데 희한하게 또 졸립니다.

시험기간 중엔 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잠이 몰려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딱 한 시간만 자고 개운한 머리새벽까지 집중해서 공부해겠다"


밤 12쯤으로 알람을 맞춰두고, 혹시나 깊은 잠이 들까봐 소파에 기대 잠시 눈을 붙여 봅니다.

하지만 눈을 뜨고 일어나면 다음날 새벽임을 깨닫고 망연자실합니다.

결에 알람 소리를 들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습니다.

스스로 위로해봅니다.


"이럴 거면 침대에서 제대로 잘걸, 오늘부터 진짜 시작해야지, 하루정도 늦게 한들 뭔 차이가 있어"


허나, 불행하게도 시험기간 내내 이런 사이클을 맴돌면서 허송세월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이러니 내학창 시절에 최선을 다해 공부한 기억이 있을 리 없습니다.

어쩌면 애초에 그럴 의지와 능력이 부족했다 함이 솔직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 나에겐 행동으로 옮기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내 능력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내게 떨지는 업무는 늘 해내기 어려운 일들이라는 생각었습니다.

남들이 하기 싫어 떠넘긴 일들 다 내 몫인 듯했습니다.

회사에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낮선 일도 유독 나한테만 분장되는 듯하여 짜증이 많이 났었습니다.

가 한 일의 대부분이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정해졌다는 생각에 불평불만이 많았습니다.

일 열심히 안 해도 술 잘 마시고 사내정치 잘해서 승승장구 한 사람 숱하게 봐왔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을 다해 봤공은 엉뚱한 사람에 돌아 뻔할 거라 예상했었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할 리 없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한 일은 결과 항상 시원찮았습니다.


아주 가끔  적성이나 체질에 딱 맞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엔 내가 처한 여건을 탓하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집과 직장이 멀어 출퇴근에 하루 에너지의 많은 부분을 소진해서 일할 기운이 부족할 때가 많았습니다.

꼼꼼한 상사를 만나 일의 경중에 관계없이 지적질당하느라 하루 종일 기분 나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시원찮은 부하직원이 오는 바람에 그 녀석이 해야 할 몫까지 하다 보면 막상 내가 할 일은 손 못 댄 적도 허다했습니다.

힘없는 부서나 곁가지 부서에 보직을 받아서, 뭘 하나 하려 해도 내 뜻을 관철해본 경험도 별로 없습니다.

게다가 회사 바깥에서 우리를 좌지우지하는 파워 기관이 있어서 이리저리 휘둘리기도 했습니다. 

이러니 결과가 시원찮을 때마다 나는 최선을 다할 수 없노라 둘러기 일쑤였습니다.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내 기준에만 그랬을 뿐, 남이 보기에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겁니다.

능력도 부족한데, 처한 환경을 탓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부질없는 짓이라 여기며 허송세월 했습니다.

어쩌면 애초에 내겐 그럴 의지와 자신감이 부족했다는 게 솔직한 고백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A급 직장인이 될 수 없고 B급 인생을 살아야만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음을 퇴직이 멀지 않은 근자에 비로소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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