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는 일은 공적인 분야라서 시청을 비롯한 공공기관과 협의가 많다. 실무차원에서서로 조율이 순탄하게 이루어지는 협의가 대부분이지만 더 윗선의 판단과 논의가 필요한 사안도 많다. 경우에 따라서는 최상층 의사결정자 간의 결심이 요구되는 상황도 적지 않다.
꽤 오래전에 업무협의를 위해 상사를 모시고 어느 중소도시의 시장님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나는 실무 책임자로 우리 쪽 의사결정권자인 상사를 보필하여시장님을만나러가게 되었다.만약의 교통상황에 대비해예정된 시간보다 여유 있게 도착하였고,부속실 직원의 안내대로 대기실에서 기다렸다.중요한 사항의 결재나 보고가 있었는지 공무원들이 자주 들락거렸다.한동안 비서가 내온 차를 마시는 사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상사와 나는 결례라도 될세라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순간 당황했다.시장님이 금방 뭔 일을 하던 중이었는지 쟈켓은 걸치지도 않은 채 우릴 맞았다.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좀 의외였다. 어느 기관이나 외부인사가 공식 방문하면 서로 간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 단정한 차림으로 맞아주기 때문이다. 그는 소매를걷어붙이고 넥타이도 느슨하게 푼 채 소박하고 수더분한 미소로 우릴 반겼다. 무척 격의 없는 분이라고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집무실도 다른 도시의 시장실과는 사뭇 달랐다. 다소 근엄하고 깔끔히 정돈된 집무실이 아니라 현업부서 분위기가 물씬 났다. 여기저기에 각종 설계도면이며 보고서와 서류들이 흩어져 나뒹굴고 있었다.시장집무실이라기보다는 실무 직원의 업무공간 같았다. 엄청나게 일을 열심하시는 분이라 짐작했다. 민선시장님들은 역시 다르다는 인상을 다시 한번 깊게 받았다.
그런데, 시장님과 악수를 하고 명함을 주고받은 뒤에 우린 우두커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지만도무지 앉아야 할 곳을 찾을 수 없었다.회의 탁자며 책상 위는 물론이고 응접테이블과 소파에 까지 각종 서류와 도면들로 뒤덮여있었다.시장님도 특별히 어디 앉으란 말이 없었기에상사와 나는 서로 마주 보며 멋쩍어했을 뿐이었다.그러는 사이 시장님이 소파에 가서 대충 치우고 걸터앉더니, 그제야 우리도 앉으라 권했다. 그의 맞은편 소파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가서 흩어진 서류더미를 적당한 곳에 내려두고 앉았다. 앉기는 앉았는데 엉거주춤 엉덩이만 걸친 꼴이었다. 곧이어 비서가 내온 찻잔도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헤집고 빈 공간을 만든 뒤 올려놓았다. 그렇다고 차를 마실 기분은 아니었다.
의례적인 말들이 오고 갔다.시장님의 순박한 인상과 어눌한 말씨에 서로 간의 서먹함은 차츰누그러졌다.한데분위기가 참 묘하였다. 대화는 도무지 본론으로 들어가지질 않았다. 정신 사나운집무실 분위기에 마음마저 어수선했기 때문이다. 상사도 그런 것 같았다. 도저히 현안사항같은 심각한 대화를꺼낼 형편이아니었다.상사는 말은 없었지만 그날은 상견례로 치고 적당히 운만 띄워 놓은 뒤다시 한번 왔으면 하는 눈치였다.그렇게 시간을 때우고 우린 왠지 모를 찝찝한 기분으로 시장실을 나왔다.
몇 주 후 시장실을 다시 찾았다. 부속실 직원은 구면이어서였는지반갑게 맞아주었다. 시장님은 이번에도 수더분한 모습으로 우릴 맞았다.어수선한 집무실 상태는 여전했다.지난번의 경험도 있고 해서 이번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소파에 성큼성큼 걸어가 자연스럽게 앉았다. 물론 테이블과 소파 위에 흩어져있던 서류 더미를치워야 했다.이번엔 통상적이고 의례적인 서두를 짧게끝내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지난번처럼 이 눈치 저 눈치 보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시장님도 우리의 의견을성심껏 들으며 자주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우리의 의사를흔쾌히 받아들인다는 말은 없었지만, 반대한다는 표현도 분명하진 않았다. 우리 쪽에서는협의가 나름 성과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는 바닥에 내려놓았던서류들을 다시 집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서류들은 몇 주 전에 봤던 그 서류들이었다.
주변의 책이며 다른 서류와 도면들도 다시 한번 보았다. 놓인 위치나 펼쳐진 쪽, 접힌부분 등이지난번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먼지만 수북이 쌓인 상태로 보아 누구의 손길도 스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려니 하면서 별생각 없이뿌듯한 마음으로 시장님의 배웅을 받으며 집무실을 나왔다. 그 정도면 큰 가닥은 잡혔으니 실무차원의 소소한 걸림돌만 남은 듯했다. 상사도 흡족해하면서 흡연장소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사이에 나는배석했던 담당 공무원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향후 일정과 실무차원에서 조치할 방향을 대충 얘기해 둘 참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어 어느 정도 격의는 내려놓을 수 있던 사이였다. 그래서 대화 말미에 넌지시 물었다.
"시장 집무실은청소를 안 하나요?"
"웬걸요, 매일 새벽에 청소 아줌마가 다녀가죠."
"근데, 책이며 서류며 정리 정돈을 안 하나 봐요? 지난번 왔을 때 그대로 던데요?"
"말도 마십시오. 부속실 직원이 깔끔하게 정리해놔도 저녁이 되면 다시 원상태로 됩니다.
근데, 정리해두면시장님이 좀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시는 듯합니다."
"아, 본인이 보던 그 상태대로 둬야 다시 볼 때 찾기 편하니 그런가 보네요 "
"그런 것은 아니고....."
"시장님 스타일이 권위 같은 건 다 내려놓고 일을 실무자처럼 열심히 하시나 봐요?"
그 공무원은 빙긋이 웃고만 있었다. 마침 상사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상사와 나는 공무원과 악수를 하고 차에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그공무원이 내가 다가와 속삭이듯 한마디 툭 던졌다.
"시장실의 그 분위기는 시장님이 만드신 설정입니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더 구체적이고 소소한 내막은 듣지 않아도 모든 게 금방 파악되었다.
며칠 후 나는 상사의 부름을 받았다. 상사의 집무실에 들어서니, 우리 일과 관련된 신문 기사 스크랩을 훑어보던상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허허실실에 우리가 당했네."
그날 우리가 시장님과협의한 사항이 지역신문에 기사화되었다. 시장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기사가 작성된 듯했다. 우리가 의도한 것과는 완전 반대로,게다가 우리가 요구한 내용이 참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투의 내용이었다. 시장은 우리의 얘기를 듣고 우리의 사정을 이해한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약점을 파악했던 터였다. 거기에 자신의 논리를 버무려 우릴 옴짝달싹 못하게 언론 플레이를 한 것이다.
처음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눈치챘어야 했다. 상대를 방심하게 만드는집무실 분위기며 응대 태도는 잘 계산된 것이었다. 한참 후에 들은 얘기지만, 집무실을많은 책과서류, 보고서와 설계도면들로 어지럽게 만든 의도도방문자들을 현혹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한다.우릴 배웅했던 공무원의 '시장님의 설정'이란 말을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한 시도 쉴 틈 없이 열심히 일한다는 무언의 광고, 수더분하고 격의 없다고 착각하게만드는 행동,상대를 방심케 하는어눌한 화술,그게 모두 다 나름의 전략이요 콘셉트이었던셈이다.
세상사 모든 일이 이처럼 계산적이고 정치화되면 참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가끔 서툰 글이라도 쓰면서 그나마 남아있는 감성의 촛불을 지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