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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인생 Jan 16. 2021

정치적인 사람

허허실실

  내가 하는 일은 공적인 분야라서 시청을 비롯한 공공기관과 협의가  많다. 실무차원에서 서로 율이 순탄하게 이루어지는 협의가 대부분이지만 더 윗선 판단과 논의가 필요한 사안도 많다. 경우에 따라서는 최상층 의사결정자 간의 결심이 요구되는 상적지 않다. 


  꽤 오래전에 업무 협의를 위해 상사를 모시고 어느 중소도시의 시장님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실무 책임자로 우리 쪽 의사결정권자인 상사보필하여 시장님을 만나 가게 되었다. 만약의 교통상황에 대비 예정된 시간보다 여유 있게 도착하였고, 부속실 직원의 안내대로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중요한 사항의 결재나 보고가 있는지 공무원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동안 비서가 내온 차를 마시는 사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상사와 나는 결례라도 될세라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순간 당황했다. 시장이 금방 뭔 일을 하던 중이었 쟈켓은 걸치지도 않은 채 우릴 맞았다.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좀 의외였다. 어느 기관이나 외부인사가 공식 방문하면 서로 간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 단정한 차림으로 맞아주기 때문이다. 그는 소매 걷어붙이고 넥타이도 느슨하게 푼 채 소박하고 수더분한 미소로 우릴 반겼다. 무척 격의 없 분이라 은 쪽으로 려 애썼다.


  집무다른  시장실과는 사뭇 달랐다. 다소 근엄하고 깔끔히 정돈된 집무실이 아니라 현업부서 분위기가 물씬 났다. 여기저기에 각종 설계도면이며 보고서서류들이 흩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시장 집무실이라기보다는 실무 직원의 업무공 같았다. 엄청나게  열심하시는 라 짐작다. 민선시장님들은 역시 다르는 인상을 시 한번 깊게 받다.


  그런데, 시장님과 악수를 하고 명함을 주고받은 뒤에 우린 우두커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지만 도무지 앉아야 할 곳을 찾을 수 없었다. 회의 탁자며 책상 위는 물론이고 응접테이블과 소파에 까지 각종 서류와 도면들로 덮여있었다. 시장님도 특별히 어디 앉으란 말이 없었기에 상사와 나는 서로 마주 보며 멋쩍어했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시장님 소파에 가 대충 치우고 걸터앉더니, 그제야 우리도 앉으라 권했다. 의 맞은편 소파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가서 흩어진 서류더미를 적당한 곳에 내려두고 앉았다. 기는 앉았는데 엉거주춤 엉덩이만 걸친 꼴이었다.  곧이어 비서가 내온 찻잔도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헤집고 빈 공간을 만든 뒤 올려놓았다. 그렇다고 차를 마실 기분은 아니었다.


  의례적인 말들이 오고 갔다. 시장님의 순박한 인상과 어눌한 말씨에 서로 간의 서먹함은 차츰 누그러졌. 한데 분위기 참 묘하였다. 대화는 도무지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정신 사나운 집무실 분위기에 마음마저 어수선기 때문이다. 상사도 그런 것 같았다. 저히 현안사항 같은 심각한 대화를 꺼낼 형편이 아니었다. 상사말은 없었지만 그날은 상견례로 치고 적당히 운만 띄워 놓은 뒤 다시 한번 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고 우린 왠지 모를 찝찝한 기분으로 시장실을 나왔다.


  몇 주 후 시장실을 다시 찾았다. 부속실 직원은 구면이어서였는지 반갑게 맞아주었다. 시장님 이번에도 수더분한 모습으로 우릴 맞다. 어수선한 무실 상태는 여전했다. 지난번의 경험도 있고 해서 이번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소파에 성큼성큼 걸어가 자연스럽게 앉았다. 론 테이블과 소파 위에  흩어져있던 서류 더미 치워야 했다. 이번엔 통상적이고 의례적인 서두 짧게 끝내고 본론으로 바들어갔다. 지난번처럼 이 눈치 저 눈치 보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시장우리의 의견을  들자주 고개를 끄덕여 주다. 우리의 의사를 흔쾌히 받아다는 말은 없었지만, 반대한다는 표현도  분명진 않았다. 우리 쪽에서는 협의 나름 성과가 있다고 판다.


  자리에서 일어서 나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서류들을 다시 집어 테이블에 올 두었다. 서류들 몇 주 전에 봤던 그 서류들이었다.

주변의 책이며 른 서류와 도면들도 다시 한번 보았다. 놓인 위치나 펼쳐진 쪽, 접힌 부분 등 지난번과 별로 달라지지 않 채 그다. 먼지만 수북이 쌓인 상태로 보아 누구의 손길도 스치지 않은 채 방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려니 하면서 별생각 없이 뿌듯한 마음으로 시장님의 배웅을 받으며 집무실을 나왔다. 그 정도면 큰 가닥은 잡혔으니 실무차원의 소소 걸림돌 남은 듯했다. 상사도 흡족해하면서 흡연장소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사이에 나는 배석했던 담당 공무원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향후 일정과 실무차원에서 조치할 방향을 대충 얘기해 둘 참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어 어느 정도 격의는 내려놓을 수 있던  사이였다. 그래서 대화 말미에 넌지시 물었다.


  "시장 집무실은 청소를 안 하나요?"


  "웬걸요, 매일 새벽 청소 아줌마가 다녀가죠."


  "근데, 책이며 서류며 정리 정돈을 안 하나 봐요? 지난번 왔을 때 그대로 던데요?"


  "말도 마십시오. 부속실 직원이 깔끔하게 정리해놔도 저녁이 되면 다시 원상태로 됩니다.

근데, 정리해두면 시장님이 좀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시는 듯합니다."


  "아, 본인이 보던 그 상태대로 둬야 다시 볼 때 찾기 편하니 그런가 보네요 "


  "그런 것은 아니고....."


  "시장님 스타일이 권위 같은 건 다 내려놓고 일을 실무자처럼 열심히 하시나 봐요?"


  그 공무원 빙긋이 웃고만 있었다. 마침 상사가 우리 쪽으로 걸어다. 사와 나는 공무원과 악수를 하고 차에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공무원이 내가 다속삭이듯 한마디 툭 던졌다.


  "시장실의 그 분위기는 시장님이 만드신 설정입니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더 구체적이고 소소한 내막은 듣지 않아도 모든 게 금방 파악되었다.


  며칠 후 나는 상사의 부름을 받았다. 사의 집무실에 들어서니, 우리 일과 관련된 신문 기사 스크랩을 훑어보던 상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허허실실에 우리가 당했."


  그날 리가 시장님과 의한 사항이 지신문에 기사화되었다. 시장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기사가 작성된 듯했다. 우리가 의도한 것과는 완전 반대로, 게다가 우리가 요구한 내용이 참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투 내용이었다. 시장은 우리의 얘기를 듣고 우리의 사정을 이해한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약점을 파악던 터였다. 거기에 자신의 논리를 버무려 우릴  짝달싹 못하게 언론 플레이를 한 것이다.


  처음 집무실들어섰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상대 방심하게 만드는 집무실 분위기며 응대 태도 잘 계산된 것이다. 에 들얘기지만, 집무실 책과 , 보고서 설계도면들로 어지럽게 만든 의도 방문자들을 현혹하기 위한 장치 한다. 우릴 배웅했던 공무원 '시장님의 설정'이란  떠올씁쓸하게 웃었다.


  한 시도 쉴 틈 없이 열심히 일한다는 무언의 광고, 수더분하고 격의 없다고 착각하게 만드 행동, 상대를 방심 하 어눌한 화술, 그게 모두 다 나름의 전략이요 콘셉트이었던 이다.




  세상사 모든 일이 이처럼 계산적이고 정치화되면 참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가끔 서툰 글이라도 쓰면서 그나마 남아있는 감성의 촛불을 지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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