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마르탱 게르의 귀향>

by B급 인생

주말에 빈둥빈둥 TV 채널을 이리저리 바꾸다 젊은 시절의 리처드 기어와 조디 포스터가 나오는 영화에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그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셀럽들이었기에 이 영화를 보며 오랜만에 추억에 젖고 싶었다. 영화 제목은 <서머스비>, 줄거리가 어디선가 보거나 읽은 듯한데 가물가물하였다. 러다 영화가 끝날 무렵,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이 휙 하고 머리를 스쳤다.


"맞아,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야. 코가 엄청 큰 프랑스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주연한 프랑스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도 있었지."


<서머스비>는 많이 다르게 각색한 미국판 영화지만 소설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 원작임이 틀림없었다.


미국판 영화 <서머스비>


소설은 16세기의 유명한 역사적 실화를 바탕으로 둔다. 오랫동안 도망치듯 집을 나갔던 남편이 어느 날 귀향한다. 둘 사이에 아들까지 두었는데 참으로 무심한 사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무뚝뚝하고 거칠던 남편이 다정다감하고 사랑스러운 남자로 변해서 돌아온다. 남편의 귀향 후에 부부는 한동안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아가며 딸 하나를 더 낳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을 지나가던 부랑자가 진짜 남편은 따로 있다고 한 마디 툭 던진 뒤부터 이 남자의 정체에 대한 의심의 싹이 튼다.


설상가상 남편의 아버지가 죽자 남편과 숙부 간에 재산분배를 둘러싼 갈등이 생기는데, 이 남자가 집을 나갔던 진짜 남편인지 소송으로 번진다. 제 법정에서 진위여부를 가리기가 무척 힘들었던 모양이다. 남자가 마을 사람들에게 처신을 얼마나 잘했던지 법정에서 하나같이 유리한 증언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내도 이 남자가 진짜 남편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판사가 이 남자를 남편으로 판결하려던 마지막 순간, 진짜 남편이 나타나 진실이 밝혀진다. 남편과 꼭 닮은 남자가 벌인 희대의 사기사건이었던 것이다.

재판 후 법률가나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과 논쟁이 일었다고 한다. 당시 법정의 기록을 토대로 인간의 이성과 판단능력에 대한 수많은 학술 논문이 발표되기도 했다고 한다. 사기꾼 하나 제대로 가려내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내가 골똘히 주목한 지점은 그런 거창한 법률적, 학술적 측면이 아니다.


재판 과정에서 제시된 수많은 증거와 증언들은 제쳐두고, 오랫동안 살을 맞대고 산 아내가 자신의 남편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을까 싶다. 당시 판사도 이런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소설의 말미에도 가짜 남편이 교수형에 처해진 후, 판사가 개인적으로 아내를 찾아간다. 판사와 아내가 단 둘이서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참으로 눈물겹다. 아내는 재판 과정에서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속마음을 드러낸다. 부부 사이에서만 있을 수 있는 감정과 행동들에 대해... 판사도 아내도 부부생활을 해본 당사자들이기에 가능한 대화였으리라.

부부 사이엔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 육체적인 것이던, 정신적인 것이던 살을 맞대고 살다 보면 자신의 배우자를 감별하는 그 무언가가 생긴다. 그게 체취일 수도 있고 잠버릇일 수도 있다. 남이 모르는 신체적 비밀일 수도 있고 무심코 하는 버릇일 수도 있다. 그도 저도 아니면 그냥 육감일 수도 있다.

아마 아내는 돌아온 남편이 가짜임을 일찌감치 눈치챘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아내에겐 그 진위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을 진실로 사랑해 주었던 남자, 자신을 진정한 아내로 대했던 사람, 가정다운 가정으로 이끌어 주었던 다정한 사람, 그래서 평생을 믿고 의지하며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사람, 그 사람을 진정한 남편으로 인정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재판 과정에서도 남들은 알 수 없던 진짜 남편의 비밀들을 알려주며 남자를 도왔던 것 아닐까?


프랑스판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나도 몰래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내가 결혼한 지 30년 가까이 됐지만 한 번도 품어보지 못했던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되었다. 인생에서 결혼의 의미는 뭘까? 부부라는 게 과연 뭘까? 아내에게 남편이란 어떤 의미일까? 가정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소설에선 그 답을 내놓진 않는다. 사람마다 부부마다 다를 수 있기에 정해진 답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부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 소설을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부부의 의미를, 남편의 의미를, 가정의 의미를 짚어보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짧지만 여러모로 함축적이고 무게 있는 소설이다.


소설 <마르탱 게르의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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