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세상을 기억하는 법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를 읽고 나서
나무는 해마다 나이테 하나를 만든다. 나이테를 그래서 한자로는 연륜(年輪)이라고 한다. 나무는 대체로 봄에 성장 속도가 빠르다가 여름에는 그 속도가 줄고 겨울이면 성장을 거의 멈춘다. 봄에는 엷고 넓은 나이테를 만든다. 그래서 춘재(春材)라고 한다. 반면에 성장이 둔화되는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나무의 조직이 치밀해지면서 어두운 색을 띤다. 이 부분을 추재(秋材)라 부른다. 여름에 대부분 만들어지니까 엄밀히 말하면 하재(夏材)라고 하는 편이 맞지만, 춘재와 대조를 이루기 위해 그렇게 이름을 붙인 듯하다. 아무튼, 계절이 바뀌면서 나타나는 환경변화에 따라 나이테는 모양이 달라진다.
출처 : 네이버 달리 말하면 춘재와 추재에는 당시의 기후를 비롯한 여러 환경조건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다. 그래서 나이테를 잘 관찰하면 과거의 기후나 환경여건을 유추할 수 있다. 이런 나이테의 특징을 잘 활용해서 고기후나 역사적 사건들을 해석해내는 과학분야가 있는데, 연륜연대학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 용어를 문화재 공부를 하면서 처음 접했다. 10여 년 전 전통건축 공부에 푹 빠진 적 있었는데, 대부분 목조인 우리 옛 건축물들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연륜연대학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들었다. 학계에서 건축시기를 확인하기 어려운 건축물이나 건축 순서를 두고 논란이 되던 건축물들의 연대순을 확인하는데 꼭 필요한 분야라고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연륜연대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할 뿐만 아니라 전공 학자가 없어서 남의 나라 얘기로만 들었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이 분야가 활성화되려면 나이테 데이터가 많아야 하는데 그 기초 데이터를 구축하는데도 오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니 우리나라에선 상상도 못 할 상황이었다.
기초 데이터를 구축하는 작업은 고목을 찾아 나이테를 확보하고 먼 과거까지 나이테의 연대를 연장시켜 나가는 과정이다. 그러려면 드릴 같은 작은 금속관으로 나무 중심부까지 구멍을 뚫고 젓가락 굵기 정도의 표본을 꺼내 나이테의 수와 너비 등의 정보를 측정해야 한다. 이 방법으로 해야 살아있는 나무를 베지 않고 나이테를 볼 수 있다. 나무에는 작은 구멍이 생기지만 아무는 데 오래 걸지지 않아 생명에 지장이 없다. 이것을 토대로 수령이 다른 나무에서 얻은 표본과 비교하면서 같은 특징을 보여주는 부분을 확인하고 그보다 과거의 나이테 자료를 축적해 나간다.
출처 : 생명과학사전
그러기 위해선 표본을 채집할 수 있는 다양한 수령의 고목들이 특정 기후대 지역에 많이 생존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고목이 희귀할뿐더러 현재로서는 수령이 길어야 몇백 년 안팎에 불과한 나무들이 고작이다. 그러니 몇천 년의 인류 역사를 추적할 수 있는 나이테 자료를 확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대체 방법을 찾아냈다. 오래된 유적지에서 발굴된 목조건물이나 조형물에서 표본을 채취해 살아있는 나무보다 오래된 나이테를 얻는다. 유적지를 만들 당시에 사용한 목재는 그때 시점에서 수령이 몇 백 년 된 나무를 잘라다 썼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과학자들이 구축한 연륜연대 데이터는 수천년 전 선사시대 무렵까지 이른다고 한다. 이것을 이용해 엄청난 과학적 연구결과를 거두고 있다.
연륜연대 학자들과 기후학자들은 먼 과거의 기후를 추정하고 현재까지의 기후변화 트렌드를 분석했다. 약 천 년 전부터 현재까지 지구 연평균 기온을 추정해 얻어낸 그래프는 무척 흥미롭고도 놀랍다. 제리 말만이라는 기후학자가, 그래프의 모양이 하키 스틱을 닮았다고 해서 하키 스틱 곡선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후 학계에서 널리 사용하는 별칭이 되었다. 이 그래프는 최근 150여 년 간의 평균기온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현상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급격한 변화 구간은 산업화 시기가 겹치기 때문에 지구온난화 현상이 인간 활동에 기인한다는 점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 오늘날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 재앙의 경고를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에게 합리적이고 적나라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나아가 더 많은 분석이 누적된다면 미래의 기후변화까지 꽤 정확하게 예측해서 닥쳐올지 모를 기후재앙에 대비할 수도 있겠다.
하키 스틱
하키 스틱 곡선 (http://climateaction.re.kr/index.php?mid=news04&document_srl=174766) 이 뿐만 아니다. 학계에 논란이 되었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연륜연대학의 연구 성과들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고 있다고 한다. 역사의 서술에 있어 승자의 정치적, 사회적 편견이 배제되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자료로 논란을 종식시켜 준다고 한다. 이게 다 나무가 살아오면서 기록한 오랜 기억 덕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