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나무의사 공부를 한 적 있다. 나무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퇴직 후의 삶을 즐기기 위해 전문 자격증 하나쯤은 따두어도 좋을 듯해서였다. 이 공부를 하면서 나무에 관한 유용한 지식도 많이 습득했지만, 나무가 주는 교훈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햇빛을 이용해 삶의 에너지를 만드는 나무는 양수(陽樹)와 음수(陰樹)로 나뉜다. 양수는 강한 햇빛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나무다. 반대로 음수는 햇빛이 약한 그늘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음수가 햇빛 없는 곳을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숲의 생성과 변화과정을 들여다보면 나무의 이런 속성에 따라 선명하게 대비되는 생존전략을 발견할 수 있다.
애초에 나무가 한 그루도 없는 초원에 어디선가 날아온 여러 종류의 나무 씨앗들이 싹을 틔운다. 그중에서 강한 햇빛을 좋아하는 어린 양수의 싹이 어린 음수의 싹보다 웃자라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양수는 무럭무럭 자라 숲을 형성하고 하늘을 가리게 된다. 성장이 느린 어린 음수는 양수가 만든 그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린 음수는 그늘 속에서도 조금씩 자라 세월이 흐르고 흐르면 양수보다 더 높이 솟아오른다. 마침내 음수는 잎을 활짝 펼쳐 숲의 하늘을 뒤덮는다. 이때부터 강한 햇빛을 선호하는 양수는 그늘을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숲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양수는 음수조차 살 수 없는 곳으로 날아 간 씨앗만이 그곳에서 뿌리내려 평생을 살아간다. 그곳은 여느 나무도 살아가기 힘든 고난의 장소다.
몇 해 전, 한 갤럽 회사가 한국인이 좋아하는 나무를 조사했다. 소나무를 포함하여 은행나무, 단풍나무, 벚나무, 느티나무가 Top 5에 들어있다. 그중 소나무와 단풍나무는 자연 상태의 산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수종이다. 소나무는 대표적인 양수이고, 단풍나무는 음수의 대표로 꼽힌다. 소나무는 바람이 센 산꼭대기나 바위틈과 같은 척박한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음수와 섞이면 생존하기 어려우니 음수가 살지 않는 곳으로 날아 간 소나무 씨앗이 정착한 결과다. 강한 햇빛이 있다면 다른 조건을 포기하더라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곳을 택해 살아가는 것이다. 반대로 단풍나무는 물이 풍부한 계곡 주변에서 주로 볼 수 있다. 단풍나무는 어린 시절,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다른 나무의 그늘 아래에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묵묵히 견뎌내며 조금씩 성장하여 마침내 그곳에서 확고하게 삶의 터를 잡는다.
소나무와 단풍나무는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속성대로, 각자의 생존 방식에 따라 살아간다. 소나무는 바위 투성이 땅에서도 살아내고, 단풍나무는 그늘을 한탄하지 않는다. 소나무는 강한 햇빛이 있는 곳이면 척박한 땅도 마다하지 않고, 그곳과 어우러져 독야청청 고고한 풍광을 자아낸다. 단풍나무는 주어진 그늘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낸 후, 마침내 봄꽃보다 더 고운 단풍잎을 가을마다 뽐낸다. 솔은 솔대로 단풍은 단풍대로 그 자리, 그 자태로 아름답고 숭고하다.
‘삶이 왜 이렇게 팍팍할까? 뭐 하나 제대로 갖춘 게 없잖아’하며 내 삶을 원망한 적이 한두 번 아니다. 궁핍한 가정환경,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모난 성격, 딱히 이거다 싶은 재능조차 없는 내 자질에 비관하기도 했다. 왜 내 인생만 이 모양일까 한탄도 했다. 하지만, 그게 착각이었음을 나이를 한참이나 더 먹은 뒤에야 깨달았다. 성공한 듯 보이는 사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핍과 고난의 길에서 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행복한 듯 보이는 사람도 크고 작은 고통과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탄탄대로의 인생은 없다. 삶의 기쁨과 행복도 어쩌면 고난과 역경의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행운의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단풍나무처럼 주어진 여건을 견뎌내며 버티기도 하고, 소나무처럼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돌아서기도 하면서 묵묵히 살다 보면, 우리도 한 번쯤은 행운을 마주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렇기에 삶의 길에서 조우할 행운을 알아보는 감식안을 길러두어야 한다. 다시 오지 않을 삶의 기회에 훌쩍 올라탈 수 있는 순발력도 갖춰 두어야겠다.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도 부지런히 준비하는 자에게만 찾아온다고 하지 않았나?
고난과 역경 없는 인생은 없다. 누구나 자신만의 고통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열악할지라도, 내 재능과 성격이 부족하고 흠 투성이 일지라도 나만의 퍼스낼리티로 받아들이자.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그렇게 한 세월을 살다 보면 독야청청 고고한 소나무의 아우라를 뿜게 될지, 봄꽃보다 더 고운 단풍으로 붉게 물들지 어찌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