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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무와 삶

나무속을 들여다보니

나이 듦에 대하여

by B급 인생

나무와 풀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줄기가 직경생장을 하는지 부이다. 쉽게 말해 줄기가 계속 굵어지면 나무로 분류한다. 나무줄기를 잘라보면 우선 껍질과 목질 부분으로 나뉜다. 껍질과 목질 사이에는 형성층이라는 얇은 막이 있는데, 세포분열이 왕성하게 일어나 새로운 목질을 계속 만들어내는 곳이다. 이게 나무에서 직경생장이 일어 나는 핵심 조직이다. 목질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변재와 심재로 이루어져 있다. 목질 중에 최근에 생긴 젊은 조직을 변재라 하고, 나이가 많이 든 중심 부분을 심재라고 한다.


변재 속에는 뿌리에서 빨아들이는 수분을 나무 꼭대기까지 운반하는 통로가 생긴다. 변재는 나무의 생명활동에 직접 기여하는 조직이다. 변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심재로 변한다. 심재는 모든 활동을 멈추고 딱딱하게 죽은 조직으로 생명활동에 관여하진 않는다.



<출처 : 네이버 두피디아>


이론적으로 따지면 심재가 없더라도 나무가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하지만 나무가 하늘 높이 자라기 위해서는 심재 없이는 불가능하다. 딱딱한 심재가 나무를 지탱하는 지지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세쿼이아 국립공원에는 키가 100미터를 넘는 나무가 수두룩하다. 이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도 심재의 지지력 때문이다.


(출처 : 위키백과)


심재가 죽은 조직이라 생명활동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은 엄밀히 따지면 진실이 아니다. 심재는 생명활동에 직접 기여하지는 않지만, 변재가 원활히 생리작용을 할 수 있도록 지탱하는 기능을 한다. 심재가 없다면 나무 꼭대기까지 물을 운반하는 변재 속의 통로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게 자명하다. 또 양질의 햇빛을 받아 에너지를 생산하는 나뭇잎들이 높은 곳에서 활짝 펼치지도 못할 것이다.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늠름하고 고매한 자태를 뽐내는 울창한 성목으로 성장할 수도 없다.


나무는 늙고 생명을 다한 조직이라 해도 쓸모가 없어지지 않는다. 젊은 조직이 왕성한 생명활동을 할 수 있도록 나이 든 조직이 돕는다. 반대로 나이 든 조직은 젊은 조직의 보호를 받는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들 중에 많은 수가 속이 썩어서 부러진 경우다. 심재가 부실하니 거센 바람에 버텨내지 못한 결과다. 심재를 썩게 한 부패균들은 나무의 외부를 감싸는 젊은 조직에 상처가 생겨서 침입했을 터이다. 변재와 외피 조직의 보호가 없다면 심재도 온전하게 유지되지 못한다. 나무의 생존은 젊은 조직과 나이 든 조직이 서로를 위할 때 가능하다는 말이다. 일방적인 의존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어우러져야 하는 공존의 관계다.


전문가들은 2026년쯤이면 우리나라에서 65세 이상의 노령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한다고 예측한다. 문제는 노령인구가 자의든 타의든 사회활동에서 점차 배제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노인의 경험과 지혜가 불확실성이 증대된 요즘 세상에선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과거와 달리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지난 경험과 지식이 별 쓸모가 없는 시대라는 말이다. 일정 부분 공감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노령인구를 젊은 세대가 부양해야 하는 쓸모없는 인구로만 치부한다면 사회적 낭비이자 국가적 손실이다.


나도 직장에서 이제 현업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 조직의 중심에서 한 발자국 비켜난 셈이다. 퇴직한 선배들 외엔 찾아오는 이가 별로 없다. 바쁜 후배들에게 누가 될까 안부전화 조차 조심스럽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추억에 젖어있는 시간만 많아졌다. 조직에서 점차 내 역할이 줄어들고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퇴직 후엔 더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젊은 노인이니, 꼰대 짓만 하지 않는다면 내 역할을 찾아 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렵다. 나무처럼 심재의 역할만 할 수 있어도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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