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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인생 Dec 13. 2021

말년에 공부를 하는 이유

 사람이 지닌 에너지를 생존에 필요한 만큼 쓰고 남으면 어딘가 분출해야 한다. 그 여분의 에너지가 제대로 소모되지 않으면 사람에 따라서는 이상한 행동이나 비정상적인 감정의 형태로 분출되는 법이다. 분출의 방향이 옳기만 하다면 그 에너지가 생활의 활력소가 되기도 하거니와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게 나의 소견이다. 사람마다 분출의 방향이 각양각색이겠지만, 대체로 밖으로 향하거나 안으로 향하는 유형,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자신이 어느 유형인지는 취미생활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밖으로 향하는 사람(A형)은 주로 활동적인 취미를 가진 부류이다. 골프나 당구, 등산이나 낚시처럼 운동이나 야외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이 대체로 이런 유형이다. 반대로 안으로 향하는 유형(B형)은 정적인 취미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라 보면 거의 맞다. 독서나 글쓰기, 영화감상 등 주로 예술 쪽 취향이 높은 사람 이라보면 옳다. 


 회사에서 현업을 떠나 뒷방신세가 되면 이런 유형의 구분이 확연히 드러난다. 현업을 떠났으니 그 많은 여분의 에너지와 여유시간을 여러 가지 업무외적 활동으로 메운다. 대체로 취미생활과 재테크, 그리고 자기 계발에 집중한다. A형은 주로 골프나 당구와 같은 육체적 취미활동에 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대개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활동적인 사람들이다. 이에 반해 B형은 학위 취득이나 자격증 공부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육체적 활동보다 조용히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는 부류다. 이런 구분은 취향과 성향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여분의 에너지를 어느 쪽으로 발산하느냐의 문제이지 좋고 나쁨의 기준이 아니다. 




 나는 B형의 인간이다. 골프나 테니스, 당구처럼 누군가와 어울려야 하는 운동에 끌리지 않는다. 남들 앞에서 내 실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게 너무 쑥스럽고 자존심이 상한다. 초심자 때 얼마간 배우다 그만둔 이유도 사람들에게 어리숙해 보이기 싫어서였다. 내가 그나마 웨이트 트레이닝을 오랫동안 할 수 있었던 까닭도 홀로 집중해서 할 수 있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나는 재테크에도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관찰해 본 결과 '마이너스 손'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주식투자와 부동산 투자에 실패를 경험했다. 그나마 가계에 큰 타격을 주지 않을 정도였기에 다행이었다. 그때 절대로 재테크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또 아내가 그 방면에 재능과 열정이 있어 보였기에 내가 관여하면 잦은 의견 충돌로 집안의 분란만 일으킬게 뻔했다. 내가 가정을 꾸리고 나서 한 일 중 가장 잘한 처사는 집안 재정문제를 신혼 때부터 아내에게 일임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사교성 스포츠나 재테크와 동떨어져 살아온 나는 회사에서 뒷방신세가 되어서도 나만의 세계에 빠져 살았다.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공부는 내 취향에 맞기도 하였지만 내 여분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분화구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색의 골짜기에 틀어박혀 정신적 방황을 거듭하고 살지 않았을까 싶다. 예컨대 이상한 방향으로 철학이나 종교에 빠지는 경우가 그렇다. 다행히 삐뚜루 나가지 않아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해마다 자격증 하나 취득해서 지금은 네댓 개가 되었다. 특별히 재취업이나 퇴직 후 노후대책을 염두에 두고 도전했다기보다는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공부 분야였다. 왕 공부하는 김에 그 분야 최고의 자격증에 도전해보고도 싶었다. 내실 있고 체계적인 공부를 하려면 그 방법이 최선이라 믿어서다.




 자격증을 딸 때마다 또 하나의 '장롱 면허증'을 보태는 의미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열매를 맺고 보니 마음만은 뿌듯하다. 목표를 향해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아 나 스스로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여울 작가 한 말이 떠오른다.


우리를 만들어가는 것은 이렇듯 엄청난 선택, 대단한 선택만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습관, 아주 하찮은 선택이 우리 인생의 커다란 그림을 천천히 만들어 간다. 그러니 오늘도 늦지 않았다. 아주 작지만, 아주 괜찮은 습관을 기르기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지극히 사소하지만 매일매일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소중한 대상을 찾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소한 선택을 통해 우리 삶을 구원할 수 있는 보석 같은 열쇠를 찾는 길이 아닐까 (정여울, 그림자 여행 17쪽)


 혹자는 물었다. 써먹지도 않을 거면서 뭐하러 애써 따냐고. '자격증 수집'이 취미냐고. 또 다른 혹자는 이렇게 물었다. 분야별 '도장깨기'하느냐고. 그게 모두 맞는 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내가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짓은 그것뿐이었다고. 짓 외에 내 여분의 에너지를 어디다 분출했겠느냐고. 무엇보다 그 많은 하루하루를 허송세월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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