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기피증까지는 아니지만 사람 만나기가 싫어졌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만나서 나누는 대화가 내 갈증을 충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을 만나도 저 사람을 만나도 그저 그런 얘기일 뿐이다.
때가 되면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데 의의를 두는 만남이라서 그렇지 싶다.
물론 고급 정보를 얻거나 교양을 쌓기 위해서만 누군가를 만날 수는 없다.
하지만 인생을 살만 큼 산 중년이니 삶의 진한 향기가 묻어 나오는 대화가 자연스레 흘러나와야 하지 않겠나.
10년 전이나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술이나 한잔 걸치면서 시답잖은 대화 후에 헤어지는 모임이라면 오며 가며 허비한 시간이 아깝다.
중년들의 대화는 화두가 골프나 주식, 부동산이 대부분이다.
나는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분야다.
내용도 정확한 정보라기보다는 '카더라' 통신에 근거하다 보니 대화가 진행될수록 시시한 수다로 흘러가기 일쑤다.
그나마 대화가 골프, 부동산, 주식에서 끝나면 다행이다.
누군가 말문을 트면 온 나라 걱정을 다하는 정치평론의 장으로 바뀐다.
요즘처럼 국론이 첨예하게 부딪치고 팬덤 정치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보니 아무리 친구나 동료 사이라도 저절로 편이 갈리고 언쟁으로 발전할 때가 많다.
나이가 들면서 굳어진 저마다의 개똥철학으로 서로 고집을 피우다가 그저 악다구니만 내지르는 지경에 이른다.
술기운에 멱살잡이가 일어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적이 한두 번 아니다.
학술적 토론이나 철학적 담론을 나누자는 모임은 아니지만 대화의 수준이 이 정도면 특별히 절친한 사이가 아닌 다음에야 만나서 뭔 즐거움이 있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내 성정상 모임을 즐기는 편이 아닌데, 이럴 줄 예상은 했지만 괜히 나왔다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무엇보다 나이들어 하는 짓이 참 유치하고 남부끄럽다.
나는 만나서 나누는 대화가 예전 TV 프로그램 <알쓸신잡> 같은 분위기이길 바란다.
그렇다고 전문가 같은 수준 높은 지식의 향연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이에 걸맞게 기품 있고 교양 있는 분위기를 바랄 뿐이다.
중년이 되면 세상사를 웬만큼 알만한 나이니 대화도 품격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꼭 지식이 풍부해야 품격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생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깊이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
그런데도 피상적인 지식 몇 마디를 하고 나면 밑천이 다 드러나고, 유치하고 저급한 수준의 수다로 흘러갈 뿐이다.
젊을 때는 먹고살기 위해 직업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느라 독서할 시간이 부족했을 터이다.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잡은 중년 무렵엔 노안이 와서 도무지 책을 못 읽겠다는 사람이 많다.
게다가 여전히 재테크나 재취업에 관심이 높을 뿐,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과 성찰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사람을 만나봐야 대화의 내용과 수준이 신변 잡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리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안쓰러울 뿐이다.
사무실에 나가도 마찬가지다.
주변에 온통 현업을 떠난 임금피크직들만 접하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제 정년퇴직이 멀지 않아 재취업을 위한 자기 계발을 하느라 하루를 보내지 않는다면 시간이 남아돈다.
그러니 특별한 일거리가 없는 날은 이런저런 수다로 하루를 보내고 만다.
수다 자체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 많은 두어 사람이 온종일 사무실을 수선스럽게 만든다.
처음엔 한두 사람이 가벼운 담소를 나누다가 점차 참여자가 많아지고 그러다 화제가 이리저리 번져 시끄러울 지경이다.
자기 계발 공부를 하거나 독서를 즐기는 사람 입장에선 여간 짜증스럽고 부아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나이가 다들 지긋하니 대놓고 불평을 토로할 분위기는 아니지만 애써 참느라 공부나 독서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나는 내가 알아야 할 내용이 아니라면 굳이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편에 속한다.
하지만 귀를 막지 않는 이상 대화 소리를 피할 길이 없다.
더러는 나도 관심 있는 주제라서 한마디 보태고 싶지만 침을 꿀꺽 삼키며 참는다.
한번 끼어들면 쓰잘데 없는 말장난에 휩쓸리게 되고 스스로도 통제가 안되곤 했기에 아예 외면한다.
언제부턴가 사무실에서 나는 과묵한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하루 종일 책만 읽는 책벌레로 취급되기도 한다.
듣기에 나쁜 평가는 아니어서 겉으로 불만을 토로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뭔지 모르게 따돌림을 받는 기분이고 비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혼자 고고한 체한다는 비아냥으로도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건 말건 차라리 난 공식적으로 그런 취급을 받고 싶다.
나는 시쳇말로 '스스로 왕따'가 되는 '스타'가 되고 싶다.
마지못해 그들에 섞여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느니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온전히 투자하고 싶다.
가끔 한참 어린 후배들도 꽤 나오는 모임에도 나갈 기회가 있다.
분위기가 젊어서 화제가 신선하다.
젊은이들 사이에 자주 쓰는 유행어나 신조어와 그들 눈에 비친 세상사를 접할 수 있어서 흥미롭다.
젊은 세대의 고민과 애로도 귀동냥할 수 있어서 딸들과 대화가 많지 않은 나로서는 간접적인 대화를 하는 셈이다.
우리 세대끼리 만났을 땐 내가 이미 알고 있거나 몰라도 사는데 별로 지장이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라 1시간도 채 안돼 지루하고 따분해 빨리 파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젊은 친구들은 날 새롭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내가 배우는 바도 많다.
하긴 그 친구들 입장에서 보면 나 같은 늙다리를 만나는 게 즐거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선배로 대접해야 하는 게 거추장스럽고 아무 얘기나 막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 불편할 수도 있다.
더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지나간 구닥다리 지식과 낡은 정보뿐이니 뭐하나 도움이 될 게 없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젊은 사람의 모임에 날 부르지도 않고 스스로 낄 수도 없으니 가는 세월이 원망스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