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을 해보니 콜레스테롤 수치가 매년 정상보다 높게 나왔으나 그러다 말겠거니 관심 없이 지냈다.
TV의 각종 건강 프로그램에서 콜레스테롤이 혈관질환의 주요 원인이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어도 남의 일처럼 여겼다.
게다가 근자에 오메가 3 를 꾸준히 챙겨 먹고 있으니 수치가 좀 높게 나온들 곧 정상으로 돌아오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꾸준히 운동도 하고 술 담배도 하지 않으니 아직까진 성인병 따위에 휘둘릴 정도는 아니라고 자신만만했었다.
하지만 거의 매일 세뇌하듯 각종 매체에서 콜레스테롤 관련 건강정보를 쏟아내니 60대가 내일모레인 나도 점점 걱정되었다.
그런 차에 올해 건강검진에서 작년에 비해 훌쩍 높아진 콜레스테롤 수치가 나와 내과 전문의의 상담을 받아보라는 권고에 더럭 겁이 났다.
차일피일 미루다 한가한 날 이른 퇴근길에 집 근처 내과를 찾아갔다.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심각한 상태라고 고지혈증 약을 처방해 주었다.
하루에 일정 시간을 정해 한 알씩만 먹으면 된다길래 아침 식사 후에 먹기로 정했다.
내 딴에 합리적인 생각이랍시고 식후 30분에 약을 복용한다는 관행을 따르기로 했다.
식후에 약을 바로 먹으면 다른 음식물에 휩쓸려 충분히 흡수가 안될 거라는 생각에 출근 후에 사무실에서 먹기로 했다.
출근에 40여분이 소요되니까 사무실에 도착하면 약 먹기 딱 맞춤인 시간이었다.
문제는 사무실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출근하는 사이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다.
이러니 일정한 시간에 먹어야 하는 약을 어느 날은 오전, 어느 날은 오후, 심지어 퇴근 후에 집에 와서야 생각나 먹을 때도 있었다.
더 난처한 일은 출근 후 PC를 켜고 메일과 각종 공지 사항을 확인하다 보면 정신이 팔려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조차 헷갈리기 일쑤였다.
안 되겠다 싶어서 한 가지 꾀를 냈다.
우선 출근하자 말자 약통을 가방에서 꺼내 책상 위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두기로 했다.
다른 일을 하다가도 약통을 보고 약 생각이 들겠거니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맘먹은 대로 되질 않았다.
약통을 가방에서 꺼내놓으려는 생각 자체를 까먹을 때가 많았다.
심지어, 약통을 꺼내놓긴 하지만 PC 화면에 정신이 팔려 약통을 보면서도 약 한 알을 꺼내 복용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던 순간도 적지 않았다.
이러니 헷갈려서 어느 날은 두 알을 먹고 어느 날은 아예 한 알도 먹지 않은 날이 있었다.
궁리 끝에 약을 먹으면 바로 약통을 가방에 다시 넣어버리기로 했다.
약통이 책상 위에 그대로 있으면 먹지 않은 걸로 알고, 없으면 먹은 걸로 인식하기 위해서였다.
헌데, 이번에는 가방에 넣어두는 걸 잊어버리는 불상사가 생겼다.
약통이 눈에 들어오면 약을 먹은 것 같기도 하고 먹지 않은 것 같기도 해 곤혹스러웠다.
이런 날은 약을 먹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약통에 남은 약 수를 세었다.
한 통에 30개가 들었으니 약을 받는 날로부터 계산하여 짐작하자는 속셈이었다.
이 방법도 초기 며칠은 맞지만 약이 얼마 남지 않은 후반부로 가면 별로 소용이 없었다.
먹지 않은 날이 종종 있으니 정확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래저래 나는 규칙적인 약 먹기가 보통일이 아니었다.
고지혈증이 문제가 아니라 날로 심각해지는 건망증이 더 문제였다.
해서 아예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신경을 쓴다고 해서 제대로 약을 찾아 먹는다는 보장이 없어서다.
다만 헷갈릴 때마다 옆자리 또래 동료에게 묻는다.
"혹시 오늘 내가 약 먹는 거 봤수?"
그 이는 대답 대신 화들짝 놀란다.
"아이고 나도 약 먹는 거 까먹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