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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혼삶여행자 Nov 11. 2021

한국 신용협동조합 발상지, 부산

사회적경제의 전초기지이자 강인한 생명력의 도시(부산 1편)

강인한 생명력의 도시

  부산은 매력적인 곳이다. 산과 강 그리고 바다를 품고 있는 부산의 지형과 역동적인 부산사람들을 보면 왠지 모를 강인한 생명력 그리고 도시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지형적으로 산이 대부분이고 평지가 거의 없어 대도시로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을 갖고 있고, 일본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상 임진왜란의 전란을 정면에서 마주했으며 일제강점기의 물자 수탈의 중심지이자 한국전쟁의 최후의 보루가 되었던 아픈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문화, 경제 교류의 관문 역할을 해오며 한국 제2의 도시로 성장한 부산은 그래서인지 어딘가 모르게 억세고 강하게 느껴진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그만큼 역동적이고 생명력이 느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산역에 내려 광장에 들어서서 접하는 풍경은 한국의 다른 대도시의 역과는 다른 느낌이다. 산등성이를 따라 빈틈없이 들어서 있는 집들이 마치 병풍처럼 나의 시선을 감싸 안는다. 흔히 큰 도시의 특징인 넓은 평지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광장 뒤편에는 많은 컨테이너와 바다 그 위로 부산항대교가 보인다. 나는 부산역 광장에서 만나는 이 모든 풍경이 부산을 상징하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흔히 부산을 생각하면 해운대, 광안리를 대표로 하는 해양관광도시로 인식을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기본적으로 부산은 평지가 부족한 지형을 지니고 있는데 금정산, 장산, 황령산 등 높은 산들이 도시 내에 분포해 있고 그사이에는 낙동강, 수영강, 온천천 등이 흐른다.(그래서 운전이 어렵고 교통체증이 심한 도시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을 바탕으로 대부분의 거주지는 그나마 생활하기가 수월한 하천 주변을 따라 집중되어 형성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원활한 자원 수탈을 위해 철도와 부산항이 개발되기 시작되었고, 한국전쟁 중에는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피난민들이 살만한 공간을 찾기란 어려웠다. 가난한 이들은 그나마 집을 지어 살 수 있는 산등성이로 올라가 판잣집을 만들어 살아오던 것이 지금의 감천문화마을, 초량마을 등이 되어 또 하나의 부산을 대표하는 모습을 만들었다.


부산역 광장과 초량동 전경

                                                         

  이러한 역사적, 환경적 배경으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부산은 시민운동에 있어 전초기지 역할을 담당하여 다양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 왔다. 특히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부산 지역의 노동 운동은 일찍이 일제 강점기 시절인 제1차 세계 대전 후 경제 불황에 따라 1920년대 초부터 활발히 전개되었다. 1931년부터 1932년 사이에는 조직적인 노동운동이 펼쳐졌다. 그리고 1933~1935년 사이 부산 지역의 일본 기업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임금 인하 반대 파업을 전개하였다. 이런 움직임은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넘어서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는 계급적 자각으로 이어지게 했고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안정·향상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부산은 민주화 운동에서도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을 선도하며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으로는 1960년 4·19 혁명, 1979년 부마항쟁,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1987년 6월 민주 항쟁 등이 있다.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발췌


부산가톨릭센터 앞 6월 항쟁의 중심지 기념비

                                     

  이처럼 부산지역의 역동적인 시민운동의 역사를 봤을 때 부산을 단순히 관광도시, 해양도시로만 바라보기에는 부산에 대해 아주 일부분만 보는 것이다. 부산은 현대사에 있어 한국의 사회혁신 전초기지였다.     


한국 신용협동조합의 시작, 메리놀 병원

  그러한 부산에서 한국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이하 신협)이 시작되었다. 주변을 돌아다니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금융기관 중에 하나인 신협이 부산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경제에 있어 가장 근간이 되는 신협이 왜 부산에서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 부산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부산역에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인 중앙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17번 출구로 나와 부산 중구청 방향으로 걸어간다. 부산답게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가쁜 숨을 내쉬며 10분 정도 걸어 도착한 곳은 중구청 앞에 있는 메리놀 병원(부산 중구 중구로 121)이다. 신협의 발자취를 찾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이 병원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곳이 한국의 신협 운동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병원과 신협,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느껴진다. 우선 병원 안을 들어가면 병원의 역사에 비해 최근에 리모델링이 되어서인지 깔끔한 모습이다. 메리놀 병원은 1950년 한국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의료를 중심으로 헌신과 봉사의 정신을 나누고자 미국 메리놀 수녀회에서 설립하였으며 1969년 이후에는 천주교 부산교구 유지재단으로 이관되어 운영되고 있다. 정문을 들어서니 가톨릭 의료원답게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의료를 통한 사랑을 나누겠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의료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돈벌이 사업이 되어가고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이 사라져 가는 요즘 같은 시대에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단순하고 당연한 문장 같으나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특히 'COVID-19'로 힘든 지금 시기에 마음 깊이 울리는 문장이었다. 이어서 한국 신용협동조합의 발상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병원 내부를 둘러보았다. 벽면에 걸린 병원 안내도를 보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의사신용협동조합이었다. 병원 내에 운영되는 신용협동조합을 보니 이곳에서 신용협동조합이 시작되었다는 흔적을 일부 느낄 수 있었다.          

    

메리놀병원 전경

                                                           

메리놀병원 내 위치한 부산 의사신용협동조합

                                           

  그렇다면 신용협동조합은 무엇이고 언제 시작된 모델일까? 신용협동조합은 금융기관을 넘어 한 명의 부자보다 백 명이 잘 사는 부자 동네를 키우는 것을 가치로 하는 지역발전 중심의 금융기관으로서 1849년 독일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당시 빌헬름 라이파이젠(F.W.Raiffeisen)은 라인강 중류의 농촌 마을인 바이어부쉬에 시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가 부임하던 때 고금리 사채로 신음하던 농민들을 돕기 위해 빈농구제조합을 설립했다. 또한 농민들이 스스로 자본을 모아 자금을 조성하고 이 자금을 공동으로 운용하여 낮은 이자로 서로에게 대출하는 제도를 구상했다. 이것이 세계 최초 신용협동조합인 셈이다.

신협과 은행의 차이

  한국 신용협동조합의 시작은 미국 출신의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가 메리놀병원에서 근무 당시 메리놀 병원, 성분도 병원, 가톨릭 구제회의 임직원들 27명을 조합원으로 하는 한국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인 성가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한국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인 성가신용협동조합 설립 당시 모습(출처: 신용협동조합 블로그)

                                                                

  그렇다면 한국인도 아닌 미국인인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왜 한국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을까? 그녀는 1900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출생하여 1930년 메리놀 수녀회로 평양교구에 부임하면서 한국과 첫 인연을 쌓게 된다. 그리고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이때 외국 원조단체협의회에서 활동을 하게 됨과 동시에 부산 메리놀 병원으로 부임한다. 이때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우리나라에 가난과 불신, 비민주적 정치가 횡행할 때였다. 한국인을 특별히 생각했던 수녀님은 이러한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통한 자립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1957년 57세의 노학을 마다하지 않고 캐나다 사베리오 대학에서 신협 운동을 연구하고 1959년 부산 메리놀병원 나사렛의 집에서 신용협동조합 운동 워크숍을 개최하게 된다. 그리고 그다음 해 1960년 5월 1일, 최초의 한국 신용협동조합인 부산 성가신용협동조합(聖家信用協同組合, Holy Family Credit Union)을 설립한다. 그 후 서울에서는 같은 해 6월 장대익 신부의 지도 아래 '협동 경제 연구회'를 중심으로 결성된 가톨릭 중앙 신용협동조합을 발족하면서 전국으로 신용협동조합 운동이 확산이 되는 기초가 되었다.               


(출처: 신용협동조합 블로그)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성가 신용협동조합의 설립에서 멈추지 않았다. 조합원이 급증하자 ‘협동조합 교도 봉사회’, ‘신협연합회’를 설립하여 신규 조합의 설립과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전반적 인지도 및 교육 활동을 확대하였고 지도자 강습회를 시행하여 신용협동조합 운동 정착과 확산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였다.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가 한국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미국 신협연합회에서 1964년 신용협동조합연합회 설립의 일등공신으로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의 공로를 인정하며 1967년 국제 개척자 표창을 수여했다. 한국 정부에서도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며 한국 신협 운동의 산파 역할을 한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이렇게 그녀는 ‘한국신협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녀가 뿌린 씨앗은 큰 열매로 성장하여 한국 신용협동조합은 자산규모 세계 4위, 아시아 1위 등 명실상부한 선진 신협국이 되었다. 신협이 600만 조합원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조, 자립, 협동의 가치로 세워져 "신협의 중심은 언제나 사람"이라는 신협 이념을 살려 지역의 조합원이 필요할 때 자립을 돕고, 이익을 지역의 조합원에게 다시 환원하는 비영리 금융기관이기 때문 아닐까? 이렇게 성장한 한국 신용협동조합의 어머니인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의 자취를 찾아보기 위해 방문한 메리놀 병원에서는 직접적인 그녀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병원을 떠나기 전 주차장 입구에 마련된 성모상을 잠시 들렸다. 이곳에는 ‘부산/경남지역 주민들을 위한 의료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설립되었다’는 설립 취지가 적혀있는데 이 병원의 문화가 이곳에서 한국의 신용협동조합을 탄생시킨 매개체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한국 신용협동조합의 역사  (출처 : 100년의 약속 행복한 경제를 말하다, 신협중앙회 지음, pp137~141)


부산 민주운동의 성지, 부산가톨릭센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한국신협발상지 기념비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병원을 나서 오른쪽으로 걷다 보면 오른편에 부산가톨릭센터(부산 중구 중구로 71)가 있다. 이곳은 앞서 언급한 6월 민주항쟁이 농성 현장이었던 곳으로 부산 민주화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었던 곳이다. 센터 건물 뒤편으로 가면 한국신협발상지 기념비 및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기념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6.25 동란 이후 궁핍한 생활 속에서 저축할 것이 없는 서민들에게 협동운동만이 우리 민족의 살길임을 확신시켜 1960년 이곳에서 한국 최초의 “성가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였다. ‘한국에서 신협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오직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한국 국민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신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 앞에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리며 그녀는 한국 신협운동의 어머니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기념비에 적힌 글처럼 가브리엘라 수녀는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의 하나로 너무나 가난했던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면서도 지속 가능한 모델을 고민하셨고, 그 결과로 신용협동조합 모델을 한국에 소개하였다. 그렇게 뿌리내린 신용협동조합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자금의 중개, 거래의 원활, 투자 기회 제공, 위험의 전환이라는 금융의 고유의 기능과 목적을 지켜나가며 서민을 위한 금융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 고유의 목적보다 자금력이 있는 이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한 것이 현재의 금융업계의 모습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러한 신협이 한국에 존재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하셨던 수녀님의 동상을 바라보며 사회를 이롭게 바꾸는 것은 사회문제를 지속 가능하게 해결하고 싶은 열정과 사랑의 실천이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신협 발상지 기념비와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 흉상

                                         

깡통시장과 중앙성당

  가톨릭회관을 나와 우측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유명한 깡통시장과 국제시장이 나온다. 이곳을 찾아가는 이유는 앞서 설명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인 성가신협 본점(부산 중구 국제시장2길 20-1)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신협이 가브리엘라 수녀님께서 한국에 처음으로 설립한 신협이라고 생각하며 바라보니 감회가 새롭다. 아마 모르고 보면 평범한 신협으로 무심코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시장 한편에 평범하게 자리 잡은 성가신협이지만, 그 모습이 서민과 함께 하는 호흡하는 신용협동조합 모델의 상징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현재의 성가신용협동조합 본점

  여행을 오면 그 지역의 시장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데 부산답게 왁자지껄 에너지가 넘치는 풍경에서 에너지를 받는다(성가신협 근처에 영화 '국제시장'에서 나온 꽃분이네 가게가 있으니 오신 김에 방문하셔도 좋겠다) 시장 한 바퀴 구경하고 오늘의 마지막 코스로 중앙성당(부산 중구 용두산길 9)을 들렸다.


부산 중앙성당


  중앙성당은 가브리엘라 수녀님께서 부임받아 섬기신 성당이다. 순백색의 외관이 인상적인데 성당의 구조는 부산의 특징을 이어받아 언덕배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건축한 느낌이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대부분의 교회가 전쟁의 포화 속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중앙성당은 오히려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고 한다. 부산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성당답게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는데 그들을 위한 구호활동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성당으로 잠시 들어가 차분한 시간을 보내며 신용협동조합 시작의 발자취를 따라간 여행을 마무리했다.



<이동 코스>


<여행 팁>

  오늘의 코스는 부산의 구도심인 중구를 중심으로 코스가 이루어져 있다. 중구에는 자갈치시장, 보수동책골목, 용두산공원&타워, 남포동, 부산근대역사관 등 유명한 관광지와 가까우니 연계해서 돌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 본 답사기는 현장 답사를 기본으로 관련 도서와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으며 참고자료는 출처 표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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