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흔적을 찾아간 원주(원주 1편)
원주는 우리에게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도시다.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 곳도 아니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곳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강원도란 명칭은 조선 초기인 1395년(태조 4년)에 강릉과 원주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현재 도청에 해당하는 강원감영이 설치될 정도로 원주는 오래전부터 강원지역에서 경제, 교육, 문화의 중추적 역할을 하며 가장 번성했던 곳이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심부에 속해 있어 철도 중앙선이 원주시의 중심부를 영동고속도로는 원주시의 서북부를 통과하는 교통 요지로서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제1야전군사령부, 육군 제36보병사단 등이 주둔하며 군사도시로서의 기능을 수행해 왔고 그래서 원주를 군사도시로 기억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그러했던 원주가 최근에는 의료혁신도시로 변모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한국관광공사 등 13개 공공기관이 17년도에 원주로 이전하였고 의료, 건강바이오산업, 제약 등 첨단 산업 거점 도시로 성장하기 위한 지식기반형 연구 및 생산단지로 조성 중이다. 또한, 문학적으로 접근하면 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께서 말년을 보내신 곳이자 소설 토지를 완성한 곳이 바로 원주였다. 박경리 문학공원에 방문하면 관련 자료 등을 찾아볼 수 있다.
강원지역 내에서는 거점도시로 자리했지만, 외지인들에겐 강렬한 인상은 없는 곳이기도 했던 원주가 60~7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과 생명운동의 베이스캠프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또한, 현재는 협동조합의 도시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 흔적을 찾기 위해 우선 강원 원주시 중앙로에 위치한 무위당 기념관(강원도 원주시 중앙로 83 4층)을 방문하기로 했다.
이곳은 원주 사회적경제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생애를 만날 수 있는데 그의 연혁, 서예 작품, 각종 자료가 보관되어 있고 사전에 신청하면 선생의 생애에 대한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한국 생명운동, 협동조합의 아버지라 불리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 그는 1928년 10월 16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 406번지에서 태어났다. 원주초등학교, 배재고등학교를 졸업 후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 공과대학 전신)에 입학하였다. 1945년 당시 미군 대령의 총장 취임을 핵심으로 하는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투쟁의 핵심적인 참여자로 지목되어 제적당한 후 1946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다.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통역관으로 군 생활을 잠시 한 뒤 원주로 돌아가는데 이 시기부터 유교, 불교, 도교, 그리스도교 등을 골고루 접하며 자신만의 도덕적, 지성적, 사회적 세계관을 키워나갔다.
1954년에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없어 춘천으로 원주의 학생들을 보내야 했던 문제를 해결하고 지역 내 인재들이 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김재옥, 김종호, 이종덕, 장윤, 한명회 등과 함께 대성고등학교(강원 원주시 북원로 2001)를 설립하였다. 그와 함께 당시 이승만 정권의 독재정치에 강한 비판의식을 가지며 이를 변화시키고자 직접 정치 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두 차례 낙선을 하고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61년 구속되어 64년 후반 출소하게 된다. 그 이후 그는 정치활동 정화법에 의해 모든 활동에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정치에는 뜻을 접고 칩거에 들어갔다. 하지만 1965년 원주교구에 부임받은 지학순 주교를 만나 신협 운동의 길로 들어섰으며 지역사회의 변화를 일으킬 동지들을 규합하는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지학순 주교는 부산에서 사제가 되었는데 '한국 신용협동조합 발상지, 부산'편에서 다뤘던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님이 펼치신 신용협동조합 운동이 전쟁으로 낙후된 부산 지역 내 삶을 개선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아 이를 부임받은 원주지역에서도 전개하고 싶었고 마침 지역 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장일순 선생을 만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1966년 설립한 첫 번째 신용협동조합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를 계기로 신용협동조합이 단순히 돈을 빌려주는 곳을 넘어 내부조합원에 대한 관계와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따라서 1972년 지금의 밝음신협을 설립함과 동시에 신협 조합원을 위한 교육을 진행했다. 그렇게 설립된 밝음신협은 급한 돈이 필요하거나 안전하게 돈을 보관할 방법을 잘 모르던 원주지역주민에게 큰 도움이 되기 시작했다. 사회적경제의 작은 열매가 맺힌 것이다.
그렇지만 곧이어 72년 8월 19일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집중호우가 내려 남한강 유역에 대홍수가 발생하여 큰 피해를 봤고 원주지역 또한 농지를 잃은 수많은 수재민이 발생하게 된다. 당시 정부는 원주지역의 수해복구를 책임질 만큼의 여력이 없었으며 지역 내 작은 신협 하나가 자연재해로 발생한 많은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때 지학순 주교가 당시 서독의 가톨릭 주교회의 자선기구인 미제레오와 카리타스를 통해 291만 마르크(약 3억 6천만 원)의 지원금을 들여오게 된다. 장일순 선생과 지학순 주교는 이 지원금을 단순히 배분하여 나눠주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민과 관이 모여 재해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재해대책위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원주지역 내 구호 활동을 시작했다.
원주지역의 재해대책위원회는 기본적인 생필품은 지원하되 농지 재건이나 재해복구활동의 경비는 복구 후 다시 반환하도록 하였다. 또한 경비를 신청할 때는 개인이 아닌 마을과 같은 단체 이름으로 신청하도록 하였다. 이는 당장의 수해문제 해결을 넘어 장기적으로 지역을 변화시키고 발전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수재 지역 주민, 가톨릭교회, 공무원 등이 참여하여 재해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활동가들은 수해를 당한 마을 내에서 생활하며 마을 복구를 위한 활동을 진행하고, 매월 말이 되면 원주 시내로 모여 서로의 활동을 평가하고 더 나은 방법과 방향을 고민했다. 이 활동들은 17년간 이어졌고 지금의 원주지역 내 다양한 사회적경제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원주는 70년대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64년 장일순 선생은 지학순 주교, 김지하 시인 등과 함께 지역을 위한 다양한 활동과 함께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름이 전면에 나서기를 꺼렸던 그는 민주화운동의 조용하며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여러 운동가들이 그에게 배움을 얻고 도움을 청하고자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그는 누구를 가릴 것 없이 따스하게 맞아주었다고 한다. 원주에 머물던 김지하 시인은, 정부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로 독재정권을 강하게 비판했고, 지학순 주교 또한 유신헌법 무효 선언을 통해 가톨릭 저항운동의 서막을 열었다. 민중가요 ‘아침이슬‘의 가수 김민기도 원주에서 활동했고, 학생운동가 손학규 역시 원주로 피신했다. 이외에도 언론인 리영희, 국회의원을 지낸 이부영, 미술사학자 유홍준, 판화가 이철수, 목사 이현주, 녹색평론의 김종철 등이 장일순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의지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그는 그동안의 활동을 돌아보고 협동조합과 생명운동에 집중하게 된다. 동학과 최시형의 생명사상 그리고 노자 사상을 부활시켜 당시 생명에 대한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져 있던 이 땅에 생명, 협동운동의 기반을 다지고 도농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을 설립한 뒤에 가장 실질이고 실천적인 녹생운동으로 한살림운동을 펼친다. 그가 이끈 한 살림 운동은 ‘생명’이라는 시대정신과 ‘협동’이라는 전통적인 가치가 결합된 운동으로 겉으로는 농산물 직거래 조직이지만 이 땅의 병들고 죽어가는 하늘과 흙과 물과 밥상을 살리자는 운동이었다.
여기서 원주의 생명운동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원주보고서를 살펴보아야 한다. 원주보고서란 1960~70년대 원주에서 전개된 민주화운동과 다양한 시민운동의 통합적 결과물이 생명운동으로 모아졌고 김지하 시인이 대표 집필한 ‘원주보고서-생명의 세계관 확립 및 협동적 생존의 확장’를 말한다. 이 보고서에 의해 본격적으로 원주의 생명운동이 논의되었다. 강원도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서 발간한 ‘감자골 삼형제의 사회적경제 이야기’에서는 원주보고서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원주보고서에 의하면 생명은 핵과 여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을 먹어야 한다. 즉 섭취해야 에너지를 얻고 살아간다. 인간은 식물이던, 동물이든 먹어야 생존할 수 있다. 그런데 산업 문명처럼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면서 즉 생명을 죽임으로 다른 생명을 섭취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즉 다른 생명의 핵을 건드리면 안 된다. 다른 생명의 여백을 섭취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생명도 지구에서 인간과 다른 생명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여백을 잘 섭취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 농업이 제시되는 것이다. 시중의 달걀은 근 본연의 핵이 없기에 닭이 되지 못한다. 즉 핵이 없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사람이 질병 속에서 살아간다. 그 원인 중의 하나가 생명이 없는 것을 지속해서 먹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생명이 없는 것으로 다양한 가공식품을 만들어서 먹고 있다. 그 가공식품에는 엄청난 화학적 가공 재료들이 들어간다. 죽임의 문명인 것이다. 이것을 살림의 문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원주보고서의 핵심이다.
훗날 원주보고서에서 다뤄졌던 내용은 ‘한살림선언’으로 이어지고 1986년 12월 4일 서울 제기동에 작은 쌀가게를 오픈하면서 앞서 말한 지금의 ‘한살림’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게 그의 생애를 살펴보고 무위당 기념관을 나오니 원주가 다르게 보였다. 그리고 무위당 기념관과 같은 건물에 있는 밝음신협, 한살림 매장도 새롭게 보였다. 그럼 그가 남긴 씨앗들이 어떻게 꽃을 피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지하상가 사거리에 있는 원주시 협동조합 지원센터를 찾아갔다.
원주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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