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마흔 중년의 제주섬 치유기
다둥이 아빠는 되었는데, 친구처럼 다정한 아빠는 되지 못했다. 회사일이 힘들다는 핑계로 대부분의 육아를 아내에게 맡겼다. 아내는 힘든 내색 없이 세 아들을 순풍순풍 낳았고 분유값 걱정 없도록 모유만으로 아이들을 키워냈다. 아이들이 자라자 파워레인저 로봇의 변신과 합체를 뚝딱뚝딱 잘 해냈고 베이블레이드 역시 누구보다 잘 돌리는 만능엄마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힘들지 않게 키워낸 것이 아니라 늘 힘들어했던 남편을 위한 아내의 전적인 인내와 배려였다. 바보같이 난 아내의 희생을 당연하듯 여겼고 선심 쓰듯 가끔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만으로 아빠의 역할을 다했다고 뿌듯해했다. 부끄러웠다.
제주에서는 달라진 아빠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내향적인 성향까지는 바꾸지 못했기에 제주에서 하기 좋은 캠핑, 낚시, 스노쿨링 같은 준비가 필요한 야외 활동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쉽게 접하고 가볍게 할 수 있는 소소한 체험부터 시작하고자 했다.
깊고 검푸른 물결 위로 크고 검은 바윗돌이 거칠게 맞물린 온평바당에 나가 온 가족이 한 소쿠리 가득 보말을 채집했다. 겅중겅중 갯바위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면 인기척에 놀란 갯강구들이 부산하게 달아났고 엄지손가락 크기의 작은 게들도 재빠른 게걸음으로 바다로 풍덩 사라지곤 했다. 아이들은 바닷물이 빠져나간 현무암 틈새에서 서툴지만 재미난 손짓으로 보말을 부지런히 떼어 내었다. 가끔 소라게가 집으로 삼은 빈 고둥까지 소쿠리에 담긴 했지만 한 소쿠리 가득한 양만큼 아이들 표정에도 행복의 표정이 가득했다. 아내는 보말로 우려낸 바다내음 진한 국물요리를 저녁밥상에 올렸고 입 짧은 아이들이었지만 이날만큼은 국사발을 손에 든 채 후루룩 후루룩 제주의 바다를 들이켰다.
아이들이 채집을 재미있어하자, 제주에서는 성산포 바당에서만 할 수 있는 조개 캐기에도 도전했다. 제주는 갯벌이 없어 서해안처럼 조개를 캘 수 있는 곳이 없는데, 둑길로 막아놓아 토사가 쌓인 오조리 앞 바당에는 조개가 살고 있어 마을에서 체험장을 조성해 놓았다. 고성 오일장에서 세갈고리 호미를 산 후 썰물 때를 기다려 바당에 들어섰다. 잔잔한 호수 같은 바당에 많은 사람들이 쪼그려 앉아 바닥을 긁으며 조개를 캤다. 우리 가족도 한쪽을 차지하고선 찰랑찰랑대는 바닷물 아래 바닥을 긁었다. 이내 갈고리에 작고 뽀얀 조개들이 딸려 나왔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잡은 조개를 손바닥에 올려 살펴 보고선 준비해 둔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았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솟아나는지 아이들은 주변 바닥을 쉴 새없이 긁었고 아이들의 수고만큼이나 조개는 바구니에 한아름 쌓이기 시작했다. 이날 저녁밥은 해감한 조개와 채로 썬 애호박을 올린 칼국수였다.
아이들은 고사리 손으로 입 벌린 조개 속살을 빼먹으며 한그릇씩 깨끗하게 칼국수를 비워냈다. 흥이 남았는지 설거지까지 서로 하겠다고 해서 왁자지껄 흥겨운 밤을 보냈다. 곤하고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꿈나라에 빠져든 아이들 옆에 모로 누워 아내는 말했다.
“제주 잘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