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마흔 중년의 제주섬 치유기
나는 산골소년이었다. 고원지대, 사방이 산이었던 분지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분지의 하늘은 조막손만 했다. 사춘기 시절, 감수성이 번져나면서부터 바다, 초원, 사막 같은 곳을 동경하곤 했었다. 경험해 보지 못했던 광활한 곳에서 수평선이나 지평선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가 마음속에 바다를 처음 품은 것은 중학생 수학여행에서였다. 부산 몽돌해변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푸른 바다는 감성 가득했던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요동치듯 흔들어 놨다. 바다는 크게 여울졌는지, 지금도 가끔 파도에 밀려 와글와글 굴러가던 자갈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곤 한다.
이보다 멋진 바다를 매일 볼 수 있다니!
온평리에 살면서 매일 바닷가에 갔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부스스한 얼굴로 슬리퍼를 끌며 포구로 나갔다. 바다는 물때에 따라 해안도로 턱밑까지 밀려와 부서지기도 했고 먼 곳으로 물러나 시커먼 현무암들을 이빨처럼 내보이며 으르렁 대기도 했다. 햇빛이 좋으면 은빛 비늘들을 반짝였고 날이 궂으면 드리운 낮은 구름처럼 잿빛으로 납작 엎드리곤 했다.
바다는 바람을 불어 일으켰다. 바람에 취할 때면 온평포구 방파제 끝자락에 자리한 먼 등대까지 취한 듯 걸어갔다. 등대에 기대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바람이 들숨과 날숨으로 폐부에 들락거렸다. 상쾌했다. 행복감에 충만해 배가 불렀다.
지리한 6월의 장마철을 보내자 한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우리가 제주로 이주한 그해 여름은 70년 만에 최고의 폭염이 닥쳐왔다고 연신 떠들썩할 정도로 더운 나날이었다.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작은 우리집은 창문이 작아 환기가 잘 되지 않았고 작렬하는 한여름 햇빛에 금새 푹푹 찌는 찜통이 되곤 했다. 방학을 맞았기에 종일 아이들을 포함한 온 가족이 집에서 더위를 견뎌내야만 했다. 총각 시절부터 사용해 왔던 족히 이십년은 더 되었을 덜덜거리는 신일 선풍기 하나를 틀어놓고 아이들은 팬티만 입은 채로, 나도 윗옷을 벗은 반바지 차림으로 더위와 싸우다가 지칠 때 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찾아 성산일출 도서관으로 피서를 갔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면 시원해지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을 이루기도 했다. 어떤 날은 반나체로 마당에 돗자리만 깔고 자다가 동틀 무렵 걷기운동 나선 주인 할아버지 발기척에 화들짝 놀란 적도 있었다. 이때만큼은 에어컨을 틀고 시원하게 살던 육지의 아파트 삶이 그리웠다.
그래도 주어진 환경에서 감사하며 여름을 살아내야 했다. 높은 습도와 무더위가 빚어내는 불쾌감에 잠식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 일찍 혹은 해거름이 되면 오름에 갔다. 제주 곳곳에 360개가 넘는 오름들이 산재해 있지만, 한라산 동쪽 중산간 지역의 오름군이 그중 유별나게 좋다. 이제는 너무 유명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용눈이오름부터 아부오름, 다랑쉬오름, 따라비오름, 높은오름, 안돌오름, 밧돌오름 등등 풍경도 좋지만 이름도 예쁜 오름들이 매번 나를 이끌었다.
오름은 혼자 오를 때 더 좋았다. 능선을 따라 굼부리에 오르면 먼 한라산이 성큼 다가서고 푸른 초장 같은 중산간 난드르에 바둑판 격자무늬 마냥 반듯하게 심겨진 삼나무 군락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굼부리를 한 바퀴 돌며 360도 파노라마 풍경을 구경하다가 맘이 드는 곳이 있으면 풀썩 주저앉아 오름에 부는 바람을 맞았다. 어느 날 오후, 더위를 무릅쓰고 나란히 붙어 있는 백약이오름과 동거문이오름, 문석이오름을 연이어 올랐다. 백약이오름 입구 공터에 주차를 하고 천천히 오름들을 오르내렸다. 3개의 오름은 각자의 특색을 가지고 있어 지루하지 않았다. 원형의 굼부리를 가진 백약이, 마소를 풀어 먹이기 좋아 목동의 이름을 붙였다는 문석이, 가파르게 굽이쳤다가 넓은 난드르를 펼쳐놓은 동거문이. 이날은 특히 동거문이 오름에서 보는 전망이 환상적이었다. 더해서 치솟은 둔덕을 올라서니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땀이 송글송근 난 내 이마를 닦아 주었다. 아름다운 풍경은 내 시각을, 청아한 바람은 내 촉각을 올올이 일깨웠다.
바람, 돌, 여자가 많아 삼다도라 하는 제주에, 바람이 좀체 없다가 드디어 바람이 왔다. 바다가 센 바람을 일으켜 남에서 북으로 불어오니, 거짓말처럼 이글대던 더위도 한풀 잦아들었다. 멀리서 태풍이 오고 있었지만, ‘이젠 좀 살겠네’ 하는 가까운 안도감이 더 좋았다. 오랜만에 더위 때문에 뒤척이지 않고 푹 잘 잤나 보다. 아침 5시, 알람 소리에 깊은 잠에서 깼다. 바람 소리가 났다. 바람이 집 앞 큰 나무를 밤내 흔들어 댔는지, 바람이 바다를 뒤집어 놨는지, 벼락같은 소리가 났다가 우수수수 하는 소리로 잦아들기도 하다가 그렇게 내 귀에 메아리로 남게 되었다.
바람을 품은 바다를 보러 가자. 새집 머리를 긁적이면서 포구에 나갔다. 파도가 거세게 몰려왔다 방파제에 부딪혀 큰 포말을 일으킨 후 사라졌다. 그런데, 집중해서 보고 있으면 파도는 잦아드는 게 아니라 계속하여 끊임없이 스스로를 복제하여 나에게 다가왔다. 그냥 쓰나미처럼 나를 덮칠 것 같다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미명에 그렇게 바람 맞은 바다를 보고 와서 다시 잠이 들었다.
오후 늦게까지 바람은 멈출 줄 몰랐다. 바람이 바다를 뒤집었나 포구에서 낚시하는 동네 삼촌들의 손놀림이 부산하다. 미끼를 꿰어 큰 호를 그리며 낚시줄을 날려 보내고, 떡밥을 뿌려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돌돔을 낚아 채더니, 이제는 벵에돔을 끌어 올린다. 풍어다! 멀리서 구경만 하던 내게도 짜릿한 손맛이 전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