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마흔 중년의 제주섬 치유기
회사를 관둔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학창시절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범생이였고 회사에서도 상사의 말을 잘 듣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도 고루하고 맹한 면이 있었다. 그런데도 보수적이고 상명하복적 회사문화 속에서 나는 일과 사람들에게 받는 스트레스들을 적절히 풀어내지 못했다. 해가 갈수록 얼굴은 점점 굳어갔고 까맣고 얼룩덜룩한 기미가 바짝 오르기 시작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이러한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생이 여든이라면 나도 꼭 절반을 산 셈이었다. 게으르게 살지는 않았는데 썩 만족스러운 삶은 아니었다. 심기일전해서 새로운 마흔 살 이후의 인생 후반전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축구경기에도 치열한 45분의 전반전이 끝나면 하프타임을 갖는다. 휴식도 취하면서 전반전을 돌아보고 새로운 전술과 파이팅으로 후반전을 준비한다. 열렬한 K리그의 팬인 나는, 지리멸렬했던 전반전을 보낸 팀이 하프타임 동안 ‘퍼거슨의 헤어드라이어’가 되었든 ‘서정원의 치어업’이 되었든, 자극을 받아 나와 후반전 짜릿한 대역전극을 일구는 것을 많이 봐왔었기에, 내 인생에도 전환점이 될 만한 하프타임이 필요했다. 나는 내 마음속 이어도인 제주에서 인생의 변곡점을 찾고 싶었다.
사실 육아휴직은 언감생심이었다. 큰 용기를 내서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었는데, 겁이 무척이나 났다. 마음속 갈팡질팡을 반복하다가 나름 비빌 언덕이라고 법이 보호해 주는 제도를 써보기로 한 것이다. 그만두는 것과 잠시 쉬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었으니까. 다행히 우리집에는 올망졸망한 아이 셋이 자라고 있었다. 남녀를 통틀어 육아휴직을 사용한 직원이 한 명도 없던 회사가 다행히 휴직을 승인해 주었다. 안다. 인원 충원도 없어 버거웠을 텐데도, 내 일을 대신 떠맡았고 임원들을 설득해서 승인을 받아준 상사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여전히 미안하고 고맙다.
휴직 기간을 제주에서 무위도식하기로 했다. 놀다 보면 병으로 스며든 우울감을 떨칠 수 있을 것 같았고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도 떠오를 것 같았다. 혹시 아나? 제주에서 새롭고 근사한 직업을 찾게 될지? 나도 인간극장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
예상은 했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별다른 자산이 없던 우리집 통장은 더 이상 월급을 받지 못하게 되자 이내 바닥을 드러냈다. 씩씩하고 쾌활하기만 한 아내도 설거지를 하다가 ‘아으 동동다리’라며 시름을 얹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입도하자마자 서귀포시 고용복지센터에 가서 육아휴직 수당을 신청했다. 매월 100만원의 수당에서 15만원은 복직 후 6개월이 지나야 일시불로 준다면서 휴직기간 동안 월 85만원 만을 입금해 주었다. 다행이기는 했는데, 넉넉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초한 일이니 어쩌랴. 육지에서 어린이집에 보냈던 네 살된 막내를 제주에서는 보내지 않았다. 아내는 아이의 적응이라는 핑계를 댔지만, 직접 돌 볼 경우 정부가 20만원을 직접 지원해 주는 것에 혹했기 때문이다. 짠내나는 살림에 20만원은 무척 큰 돈이었다.
“우리가 돈이 없지, 시간이 없냐”
황정민이 했던 영화 명대사를 슬쩍 바꿔서 위안을 삼았다. 돈 대신 시간을 얻기로 했으니, 하루하루를 충실하고 신나게 놀아보기로 했다.
아이들을 등교시킨 후 아내와 매일 여행을 떠났다. 우리에게는 딴딴한 다리가 있었고 도민할인이라는 무기도 있었다. 짧은 몇 시간의 여정이었지만, 육지에서의 하루 여행과 맞먹는 풍성함을 누렸다. 육지에 살 때는 종일 국토를 횡단해야 볼 수 있었던 드넓은 수평선을 가진 바다가 지척이었다. 동남아 관광지에 가야 만날 수 있는 비췻빛 고운 모래 바다를 인근 마을인 하도와 세화, 김녕 어디서든 호젓함 속에 누릴 수 있었다.
바닷가 근처인 일출봉과 지미오름, 말미오름, 대수산봉을 오르락 거렸다. 다리에 힘이 붙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면 동부 중산간의 용눈이오름과 손지오름, 백약이오름과 좌보미오름, 높은오름과 아부오름, 동거문이오름과 문석이오름, 다랑쉬오름과 돛오름, 안돌오름과 밧돌오름을 올랐다.
잘 정돈된 숲을 걷고 싶을 때면 비자림에 갔다. 천년 고목 비자나무가 군집하여 숲을 이룬 곳에 친절하게 깔아준 야자매트를 걷는 여행은 환상이었다. 비오는 날에는 사려니 숲을 타박대며 걸었다. 하늘로 경쟁하듯 뻗은 삼나무 주변으로 운무가 스며들 때는 신령스러운 땅에 발을 디디고 숨죽여 나무가 내뱉는 숨소리에 귀 기울이곤 했다. 가끔은 곶자왈을 걸었다. 교래자연휴양림에서 시작해 큰지그리오름을 잇는 숲길을 걸으면 태고의 제주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원시림 같은 사시사철 푸른 난대림들이 얽히고설켜 자라는 땅에 양치식물들은 낮게 잎을 내어 퍼져 있었고 물기를 머금은 이끼들은 바위들을 푸르게 수 놓았다. 아이주먹만한 달팽이가 느릿느릿 기어가는 것을 나긋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선심 써 주는 척 한 뼘 앞으로 옮겨 주면서, 나의 작은 수고로 달팽이 이 녀석 한 시간의 수고를 덜어주었다며 혼자 기분 좋아하기도 했다.
검은 현무암으로 투박하게 쌓은 밭담이 구룡만리 구불구불 이어진 뱅듸길도 자주 걸었다. 걷다가 수확이 다 끝난 밭에서 놈삐, 당근, 지슬, 감저 파치를 얻어왔다. 어촌계에서 뿔소라 작업한다고 해녀 할망들 모이라고 동네방송을 한 날에는, 나들가게 해녀 삼춘이 뿔소라 한 소쿠리를 가져다 주시곤 했다. 마트에서 사지 않고 구한 싱싱한 식재료로 아내 대신 요리를 해서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했다. 누려보지 못한 제주가 주는 행복이었다.
가난한 삶이었지만 처량하기보다는 행복감이 더 큰 일상이었다. 아마 마음에 풍성한 제주가 차고 넘쳤기 때문이었을 거다. 주말에는 아내가 문구용 가위와 빗 하나로 더부룩한 아이들 머리를 손질해 주었다. 빨간 보자기를 두른 채로 차례차례 순서를 기다리는 긴장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웠다. 다행히 아이들이 만족해서 아내는 제주에서 그간 모르던 달란트를 찾았다면서 행복해했다.
“다음에는 당신이야”는 아내에게
나는 “미안, 옆집이 미용실이야”라며 도망쳤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