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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전재복 Jan 06. 2024

*잘 가요 어리광

그녀의 어리광이 궁금했다(125)



빈 틈 없고, 지나칠 만큼 똑똑하고, 야심차고, 대단한 여자!

내가 그녀를 향하는 생각이다.

냉철하고 차가워서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사람,

똑 부러지는 입담만큼 야무지게 일처리를 해내는 리더십, 가깝지는 않지만 아주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한 삼 년 지켜본 그녀는 정말 똑소리 나는 사람이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여러모로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사람에게는 미리 겁부터 먹고 뒷걸음질 치는 못난이과에 속한다.

적당한 거리에서 자칭 타칭 번외자이거나 비주류 안에 머물며 안도하는, 어쩌면 허술한 자신을 미리 감싸기 위해 보호막을 쉽게 꺼내드는 소심한 사람일 것이다.


쓸데없는 변명이 늘어졌지만, 결론은 그녀는 자타가 인정하는 대단한 능력자가 확실하다는 말이다.


그녀에게서 나는 늘 금속성의 냄새를 맡아왔다.

뾰족한 무엇으로 웬만큼 긁어도 예리한 금속성의 울림이나 살짝 들릴까? 작은 자국도 쉽사리 허락하지 않을 단단함!

그런데 금속성일 것 같은 그녀 내면에 이렇게 부드러운 나무재질이 , 아니 어린 나뭇잎 같은 여린 결이 있었다니! 나긋나긋한 문체마저 새로운 발견이었다.

10여 년 전에 초판을 발행했고, 사진을 추가해 발간한 개정판 산문집 <'잘 가요 어리광' : 2023.10.25. 개정판>을 읽기 전에는 그랬다.




어제 행사장에서 받은 책 표지와 표제가 잠깐 눈길을 끌었다.

'잘 가요 어리광'? 내가 아는 그녀와는 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제목이어서 어떤 어리광일지 궁금했다.

집중할 수 없는 행사장에서 대충 작가 서문과 서평만 읽었는데, 서평을 쓰신 분이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작고 문인(고 라대곤선생님)이셔서 흠칫 놀랐다.

돌아가신 지 한참 되었는데 어떻게 서평을 받았지? 짧은 순간 물음표 몇 개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행사의 연장선으로 저녁식사는 전주에서 하고, 오는 길에 대야에 있는 카페에 들러 차까지 마셨다. 동행했던 두 분을 각자 집 앞에 내려주고 귀가했더니 조금 피곤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어제 받은 책을 차분히 읽었다.

어제 대충 넘겨보았던 서문부터 마지막 서평까지.(정신 차리고 보니 오래전에 출간했던 책의 개정판이어서 고인이 되신 분의 서평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보호막 안에 들어있는 과육을 맛보는 일이에요. 그러려면 껍질을 벗기는 수고는 당연히 해야지요. 밤을 먹으려면 껍질을 벗겨버리고 나머지 껍질 아닌 부분을 먹어야 하듯이 사람 사이에도 벗겨서 내버리고 취해야 할 부분들이 따로 있어요.                   

(P19. '껍질, 간직하기' 중)



다 낡은 부채가 탕약을 달이는 화롯불을 조절하는 데는 제일 좋았듯이 살만 남은 부채처럼 앙상하게 늙어버린 성이 내겐 가장 좋은 부채예요. 아직 젊어서 확 일고 싶은 급한 성질 눅진하게 주저앉히기도 하고, 미리 늙어서 의욕을 잃고 자신감마저 상실해 버린 나를 다시 살살 일으켜 주기도 하는 부채지요.

 (P120 '살만 남은 부채' 중)



촛불은 자신을 희생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운명대로 갈 뿐이다. 당연한 삶의 귀결일 뿐이다. 누군가가 촛불이 되어서 내 주위가 환해지면 좋기도 하겠지만 누군가의 희생으로 환해지는 건 싫다. 내가 촛불이라면 내가 내는 빛만큼 내 주변이 밝아질 것이고 결국 인생은 제 길 제가 밝히며 가는 것이다.

 (P130. '촛불을 켜다' 중)



부르르 하고 막 끓어오른 것을 다 익은 줄로 착각하여 설익은 말과 글로 얼마나 많은 혼란을 주었을까요. 설익은 배려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당혹하게 했을까요. 아직 덜 끓은 채 끓기를 중단한 적은 또, 얼마나 많이 있을까요. 바르르 끓어 넘치지 말고 뭉근하게 끓어야 맛이 있어요. 끓는 온도까지 쉽게 올라가지 말고 천천히 아주 오래도록 올라가야 잘 끓는 것이겠지요. 언제든 상황만 되면 곧바로 끓어 넘치는 내 안에 담금질을 오래 해서 만든 무쇠솥 하나 들어앉혀야겠어요.

  (P.134 '설끓은 국' 중)


한밤의 빗소리처럼 다정하게 조근조근 말 걸어오는 그 책 속으로, 조금은 낯선 얼굴의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나는 어느 날 문득 무작위로 책장을 넘겨보곤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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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산문집(북매니저)

#전북문인협회 회장

#2012. 6. 초판,  2023.10.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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