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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마음의 어버이( 220 )

by 봄비전재복



이상한 일이었다. 댁 전화번호를 눌러도, 핸드폰 번호를 눌러도 전화가 걸리지 않았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전화번호입니다."


무슨 일일까? 작년 늦가을에도

따님이 모시고 옥정리 늙은 제자의 집을 찾아오셨던 스승님이셨다.

조만간 연락드리겠다고 한 번 모시고 식사자리 마련하겠다고 말씀 드렸는데 이제 영영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선생님의 자제분 전화번호라도 적어둘 것을!

어찌어찌 은사님의 여동생분과 연락이 닿았다.

점심 모임이 있어서 즐겁게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식당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는데

우리 선생님이 올 2월에 세상을 뜨셨단다. 손이 떨리고 목이 메었다.

'말도 안 돼~'

왜 알리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그렇잖아도 조카(나와 통화를 한 선배의)가 알려야 하지 않을까 물어서 그냥 두라고 했다 한다. 나중에 소식이 닿으면 말해주자고.


2년 전 사모님 먼저 떠나보내시고, 혼자 남으셔서 안타까웠는데 효성스러운 아들이 가까이서 정성으로 보살펴 드린다고 들었었다.

주중 낮에는 노인주간보호센터에서 돌봄을 받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서 아들이 함께 밤을 지낸다고 하였다.

주말에는 멀리 사는 두 딸이 교대로 와서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간다고 선생님께서 내 손을 잡고 자랑하셨었다.


"효자여! 우리 아들 딸들이~"


얼마나 다행인지! 마음이 놓였었는데, 그 아들도 내 연락처를 알고 있었을 텐데...

고모의 말대로, 아니 늙은 제자를 무척이나 아끼시던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하고, 많이 슬퍼할까 봐 연락을 안 했단다.


작년에 선생님을 뵈었을 때 한쪽 다리가 커다란 풍선처럼 불어나 제대로 된 옷을 입을 수가 없었다. 인지장애의 초기 증세도 겪고 계셔서 대화도 일방통행이셨다.

오래 사시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실 줄은 몰랐다.


故 고석종 선생님! 향년 95세,

내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시다.


집이 가난하여 과외는커녕 참고서(전과) 한 권 살 수 없는 어린 제자를(1960년대 초) 당신 집에 불러 다른 아이들 틈에 끼워서 중학교 입시대비 과외수업을 해주셨다.

그때는 중학교 들어갈 때 입학시험을 치를 때였고, 특대생이니 장학생이니를 배출해 내는 것이 6학년 선생님들의 자부심과 학교의 명예를 빛내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6학년 선생님들은 대부분 과외지도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집은 삼학동이었고 선생님댁은 둔율동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과외공부가 끝나면 부모님들이 데려갔지만, 나는 집도 멀고 부모님이 데리러 오실 수도 없어서, 선생님의 여동생 방에서 자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갔었다. 그렇게 공짜로 과외수업에 끼워서 공을 들여주셨는데, 시험 보기 몇 달 전쯤 내 어머니가 사경을 헤매는 바람에 내 공부는 중단되었고, 나까지 고열에 시달리며 크게 앓는 바람에 중학교 입학시험도 간신히 치르는 비운을 겪었다.

특대생은커녕 장학생도 못 되고 겨우 우수반에 배정되는 정도에 머물렀다.


내게는 아버지 같은 두 분의 은사님이 계신다.

이제 두 분 모두 세상을 뜨셨지만,

국민학교 6학년 담임이셨던

고석종 선생님과,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을 연임으로 가르쳐주셨던 백암기 선생님이시다.

백암기선생님은 허약한 내가 病줄을 놓고 교사의 길을 가도록 도와주신 은사님이시고, 고석종선생님은 어린 제자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신 분이시다.


백암기 선생님 생존시에는 설 추석 명절과 스승의 날에는 찾아뵈었는데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해마다 겨우 스승의 날이나, 내가 책을 발간했을 때 찾아뵙는 알량한 제자를 무척이나 반겨주시던 고석종선생님을 이제 스승의 날에도 뵈올 수가 없다.

생전에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뵐 것을... 사람의 도리를 다 못한 내 잘못이 크고 죄송하다.


작년 늦가을 따님이 모시고 우리 집에 오셨을 때도 쌀걱정을 하셨다. 스승의 날 밤에(낮에는 댁에 계시지 않아서) 찾아뵈었을 때 쌀을 주지 못한 것이 걸리셨던지(몇 년 동안 농사지으신 쌀을 한 포대씩 주셨다.) 쌀 걱정을 하셨다.

따님이 옆에서


"아버지,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전선생님이 아버지보다 더 부자로 잘 사시니까요."

선생님께서는 자꾸 내 손을 만지시며


"그려? 그렇구먼!

아버지 어머니는 잘 계신가?"


또 옆길로 새셨다.

내 나이를 자꾸 물으시고


"재복이가 벌써 일흔다섯이에요. 선생님~"


하고 대답해 드리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시곤 허허 웃으셨다.


선생님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내가 단발머리 어린 계집아이로, 총명하나 집안이 무척 가난해서 안쓰러운 아이로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제 나를 가르쳐주신 은사님은 딱 한 분, 올해 87세이신 서병숙 선생님만 남으셨다.

어제 전화를 드렸더니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반갑게 전화를 받으셨다.

당신의 건강보다 같이 늙어가는

제자의 건강을 걱정하시는 만년 소녀 서병숙선생님, 국민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이시다.

영영 기회를 놓치기 전에 대도시 공포증 환자인 내가 서울에 가야 할까 보다.

선생님을 모시고 마주 앉아 눈 맞춤을 하고, 따순 손을 맞잡아 보려면!


스승의 날인 오늘, 나는 어버이 같은 은사님을 보내드리며 마음 한 켠이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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