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시인의 시집(256)
살아오는 동안
많은 누를 끼쳤다.
말을 떠난 표정이
아직까지도 무거운 것은
다 버리지 못한
마음의 찌꺼기 때문일까.
숨겨두었던 비밀 하나도
어쩌면 허상이었다.
돌아오는 오늘 마다
내 마음 사용설명서를
꺼내 본다.
<시인의 말>
조선의 시인께서 귀한 시집을 보내 주셨다. 알토란 같이 여문 말들이 빼곡하게 박힌.
'신석정 촛불문학상'을 수상하신 이력을 풍문에 들어서 이름만 귀에 살짝 익었을 뿐 페친으로 이웃이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안다고 할 만한 건덕지도 없는 분이다.
서로 담벼락을 스쳐가며 '좋아요'를 눌렀던가? 시집을 내신다고, 내셨다고 소식이 떴기에 축하한다는 문자를 드렸더니 이렇게 귀한 시집을 선물로 보내주셨다.
시집 제목부터 다소 도발적이다.
<이제 너를 놓쳐도 되겠습니까>
어법을 흐트러 놓은 이 문장이 얼른 책장을 열어 시를 읽어보고 싶게 한다.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살아오는 동안 많은 누를 끼쳤다'라고 손을 모으고 서 있으니, 앞으로 펼쳐질 어떤 문장에도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시인의 완곡한 당부 혹은 엄포로 읽혔다.
어쨌거나 시의 행간을 따라가며 시인이 <마음 설명서>까지 보여주신다니 종종걸음 치지 말고 천천히 따라가야겠다.
시 한 편을 읽고 돌아와서 시인의 말을 읽고, 다시 시인의 빛나는 이력을 읽었다.
굵직한 상이란 상은 다 쓸어다 놓으신 대단한 필력의 시인이시다.
나는 그만 기가 죽어서 갑자기 힘이 쫙 빠지고 마음이 휘청~한다.
누군가의 마음을 흔드는 시 한 편 못써본 나는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뻔뻔하게 또 뭔가를 끄적일 것이고,
또 얼굴을 붉힐 것이다.
오늘 나는 잠자코 앉아 시인의 시나 필사해 본다.
***
묵은 계절이 환상돌기를 하면
나무는 가장 높게 우듬지를 치켜세운다
쭉쭉 뻗은 수종들이 순풍을 타는 중에도
병목 지점에서 예기치 못한 변고가 발생했다
태풍에 맞서다 탈골된 가지들이
재개발 플래카드를 휘감고 매미울음에 너덜거렸다
<조선의, '옹이의 독백' 부분>
***
장대로 후리는 대로 털리면 내가 아니지
잡도리당한 듯한 일방적인 족침
그럴수록 심장은 부글부글 끓고
까무룩 눈이 뒤집혔다
내 비명은 돌이킬 수 없는 자책이 되고 말았다
냉혹하기만 한 현실에서 낭창낭창 달라붙어 있는 대추 한 알
풋풋했던 살과 피를 말리며
무슨 꼴 보려고 지독하게 매달려 있는지
더할 수 없는 극한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가장 아찔하고 위태롭게 바닥으로 떨구는 시간
유독 절망은 나에게 지나치게 친절했다
무작정 가지 끝으로 올라간 자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두들겨 맞을수록 강해지는 맷집
더 맑아지는 고통에, 없는 오기도 생기는 법
몇 번이고 돌풍에 자물치다 살아날 때면 쭈굴쭈글 고민만 깊어졌다
오랜 저항으로 단련된 나처럼
서슬 퍼런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긴다
<조선의, '대추 한 알' 전문>
***
한 줌 흙도 없는
가지 끝에 오르신 어머니
당신의 일생은 음지에서 피는 꽃이었다
무르익는 살냄새로 미소마저 빙긋
적막의 틈을 헤치고
백일홍 꽃비를 뿌린다
어딘가에 닿으려는 우아하고 품위 있는
삶의 용단
얼마나 슬픔을 묵인해야 볼모로 잡힌 그리움을 풀어줄까
<조선의, '리셋 버튼' 부분>
조선의 시인께서 이후로도 더욱 건필하시고, 문운 창성하시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