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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전재복 Jun 04. 2023

*오늘 또 가출을 시도했다

   쓰담쓰담 나를 위로해(79)


오늘 또 가출을 시도했다.


평소의 버릇대로라면 늘 선잠상태로 하룻밤에도 몇 번이나 깨어 어둠 속을 어정거리련만, 혹시나 새벽에 귀잠 들어 약속한 차를 놓칠까 봐 알람시계를 두 개나 맞춰 놓고 자리에 들었었다.

새벽 네 시 반~ 거실에서 동시에 악을 쓰는 두 개의 알리미에 남편이 먼저 튕기듯 일어나며 나를 깨웠다.


아침 5시 25분에 집을 나와, 의료원 앞에서 나처럼 집을 탈출한 두 사람을 만나서 집결지 전주로 출발했다. 전주에서 7시에 청주로 출발, 45인승 버스 두 대를 꽉 채워 떠나는 문학나들이였다.

날씨는 너무 덥지 않은 초여름의 날씨였고, 스쳐가는 풍경은 마냥 푸르렀다.


술 사랑에 빠져 사는 남자와 반백 년을 살면서도 단 한 번도 술을 사랑하지 못한 여자가 술 제조과정에 흥미가 있을 리 없지만, 가는 길에 이강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슬렁슬렁 둘러보고, 삼례예술촌도 둘러 청주로 향했다.


차로 한 시간 거리의 전주도 내겐 익숙지 않다. 가끔 다니는 문학관과 대학병원 가는 길, 전주역 가는 길 정도나 눈에 익어서 편안하게 오갈 뿐, 조금만 시내 안쪽으로 들어가도 네비에 의존하면서도 불안해하는 우렁각시 촌스런 여자다.

하기사 칠십몇 년을 붙박이처럼 살고 있는 군산도 늘 다니던 길 아니면, 낯설어 헛짚고 두리번거리고 단박에 못 찾아가는 위치감각 제로의 길치이다.

그러니 도의 경계를 넘는 일이란 이렇게 문학기행이라는 이름으로 누가 데려가주지 않으면 상상하기 어렵다.

(비행기가 태워다 주고 가이드가 따라붙는 해외여행은 제법 다닌 것 같다. 순전히 남편 따라서^^)



청주~ 이름만 들었지 처음 가보는 도시 청주의 인상은 크고 깨끗했다.

오전 행사가 있는 곳으로 접어들며 행사장 건물의 위용에 놀랐고, 길모퉁이에 건물의 이름을 알리는 소박한 이름표에 의아했다.


'문화예술제조창~ 으응? 이건 뭐지?'

그때까지만 해도 어느 고장엔가 갔을 때 본 예술인 촌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건 내 경험치를 갈아엎는 도발이었다.

그것도 오래전에 불 꺼진 담배공장을 이토록 멋진 현대감각을 덧입혀 현실로 데려온 문화예술의 복합공간이라니...

놀라웠다. 경이로웠다.

이곳을 함께 가꾸고 누리는 이곳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언제라도 연기를 내뿜을 것 같은 높다란 굴뚝을 보전한 중정은 하늘과 햇빛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두 개의 5층 건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어느 층 어느 공간이고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모두 오픈된 공간에서 사람들이 누리는 여유로운 풍경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러 개의 전시실, 공연장, 마켓, 식당, 카페, 도서관, 공방, 옷과 소품가게, 청주시청의 제2임시청사까지 웬만한 건 없는 게 없었다.

특히 넓게 오픈된 도서 열람대와, 어디고 편하게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쾌적한 공간이 참 좋아 보였다.

(대출은 안 되고, 그곳에서는 맘껏 읽고 쓰고 편히 쉴 수 있다고 한다.)


청풍명월 빼어난 경치와 충절의 고장 충북, 맛과 멋이 살아 숨 쉬고, 불의에 굴하지 않는 충신 열사의 고장 전북, 두 지역의 문학교류행사이다 보니 함께 하는 마음들이 여간 끈끈하지 않다.

오전행사는 소속과 이름을 적은 이름표를 목에 걸고 작은 극장식 공연장에서 환영행사와 강연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충북문학의 역사  *판소리  *불 꺼진 담배공장 문화의 불을 켜다. 등 3개의 주제강연이 있었는데, 그중 세 번째 강연자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변광섭대표>의 '불 꺼진 담배공장 문화의 불을 켜다'는 정말 감동이었다.

정해진 일정 때문에 쫓기듯 이야기를 마무리했지만 그분의 문화지킴이로서, 공간의 재창조자로서의 열정이 충분히 느껴졌다.


저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고, 지역의 책임자가 되어야 하는데... 존경과 무한 부러움을 담아 힘찬 박수를 보냈다.



같은 건물 안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전시관 두 곳을 구경한 다음, 바로 이웃해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청주관>으로 건너갔다.

마침 이건희 컬렉션 3점도 전시되고 있어서 그 '값나간다'는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림에 대해 형편없는 문외한이고, 그림이 가지는 경제적 가치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한다는 그림이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저 그림을 내 집 거실에 걸으라고 준다면?

나는 단칼에 거절할 것이다. 음산한 분위기와 무거운 색채가 맘에 들지 않는다. 차라리 무명작가의 평화로운 풍경이나 자잘 자잘한 야생화 그림이 낫지 싶다.

수천만 원 수백만 원이 넘게 거래된다는 그림이 내겐 영 어울리지 않으니 내가 맘에 들지 않는다 해도 뭐라 나무라지 마시라.


고인쇄박물관에 가서 직지와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리모델링 공사가 끝나지 않아서, 닫힌 문 앞에서 외관 사진 두어 장으로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섰다.


세계최고의 금속활자인 직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열네 글자라도 제대로 가슴에 담고 가야지 다짐하며, 초라하게 축소되었을 흥덕사지 터와, 백제유물 전시관을 건성건성 보고, 저녁밥까지 잘 대접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전주로 돌아오는 버스 안


"할머니, 어디예요? 몇 시에 요?"


"아직 멀었네~ 아홉 시쯤에 도착할 것 같은데?"


" 그러니까 할머니, 아홉 시 몇 분이라고 말해야지요."


글쎄~라고 말하며 머뭇거리는 할미에게 일곱 살 우리 은성이가 똑 부러지게 정해준다.


"할머니, 딱 아홉 시까지 오셔야 해요. 알았지요? 할머니~"


어둑어둑해지니 할미가 걱정되었나 보다.

현관문을 들어서니 9시 10분 전~ 울 강아지 은성이가 달려와 가슴에 안긴다.


예술의 바다, 문학의 바다를 꿈꾸며 한물결로 남실대고 싶었던, 다소 무식한 촌부의 가출사건은 이렇게 하루 만에 집으로 되돌아와 사랑의 바다에 깊이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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