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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전재복 Jun 30. 2023

*창피하고 쪽팔렸다

    쓰담쓰담 나를 응원해(89)


조명은 좀 어두웠지만 네댓 개의 통로로 이어지는 바닥에 나침판 같은 동그란 표식이 있고, 그 안에는 화살표와 장소를 알리는 글자가 친절하게 적혀있었다.


방금 빠져나온 카페, 호텔, 화장실, 주차장 등의 안내 표시가 영어도 한자도 아닌 또렷한 한글로!


별로 크지도 않은 호텔 1층에 딸린 카페에서 출구를 못 찾아 헤맸다면, 건물 밖으로 나오는 길을 못 찾아서 같은 자리를 뱅뱅 돌았다면, 지나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로비를 거쳐 밖으로 빠져나왔다면... 누구라도 어이없어서 웃고 말 것이다.


"어딘데?  그렇게 큰 호텔이 있었어?"

"정말? 어디 아픈 건 아니고?"


같은 지역에 사는 지인이나 친구들이 들었다면 이렇게 물었을지도 모른다.

외국도 아니고 다른 지역 큰 도시도 아닌 자기 사는 곳에서 이런 못난 짓이 또 있을까?

들어갈 때는 동행을 따라 들어갔고 나올 때는 혼자 나오다가 사달이 난 것이다.


바닥에 쓰인 글씨대로 따라가니 컴컴한 주차장이 나왔다.

돌아서서 가니 방금 빠져나온 카페가 보이고, 다른 쪽으로 가니 화장실이, 다른 쪽에는 호텔객실로 가는 통로가...

'이상하다. 내가 왜 이러지?'

가슴은 콩닥거리고 누가 볼까 봐 창피했다. 두어 번 제자리를 돌다가 카페에서 나오는 모르는 남자에게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물었다.


다시 카페로 들어가서 로비로 나가는 문을 열고 나서야 건물 밖으로 제대로 빠져나왔다.

정말 부끄러웠다.

누군가 나를 아는 사람이 보았을까 봐 뒤통수가 화끈거렸다.

그러니까 출입문은 지나치고 화장실로 통하는 뒷문을 열고 들어가서 병신 짓을 한 것이다. 속된 말로 엄청 쪽팔렸다.


°부끄럽다 :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 떳떳하지 못하다

°창피하다 : 체면이 깎이거나 떳떳하지 못한 일로 부끄럽다


사전적 의미는 위와 같다.  어감에서 오는 미묘한 차이를 느끼지만 대개는 비슷한 뜻으로 섞어서 쓴다.

오늘의 나는 어느 쪽에 속할까?

'창피하다'가 맞을 것이고,  속된 말이기는 해도 '쪽팔리다'가 감정적으로는 더욱 적합한 말일 것 같다.


워낙 공간지각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조금만 익숙한 곳을 벗어나도 혼자서는 겁이 더럭 난다.

아무리 그렇기로소니 넓지도 크지도 않은 건물에 갇혀서 우왕좌왕하는 꼬락서니를 함께 간 젊은 친구들이 보았다면 얼마나 한심했을까?


한 명이 빠져서 아쉬웠다


오늘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었음에도 옥정리 우리 집에 젊은 친구들이 찾아왔다.

지난번 정해진 공간을 벗어난 야외수업으로 너무 행복한 시간을 공유했기에, 오늘은 옥정리에서 또 다른 야외수업을 하기로 모의를 했던 것이다.


보리수도 끝나고 매실도 끝나고 화려한 봄꽃들도 끝났다.



유카의 꽃다발도 사나운 장대비에 지고, 대문 밖 원추리꽃이 일렬로 서서 손님을 맞았는데 정작 손님들은 비에 쫓겨 보지도 못했을 테고, 봉오리인 채 주머니만 부풀린 현관 앞 화단의 분홍백합, 키 작은 수국 몇 송이뿐이고, 자귀나무만 환하게 등을 켰는데 키가 너무 커서 높은 나뭇가지 위의 꽃들이 이파리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다.

사방이 그냥 우리 집 남자처럼 키만 껑충 크고, 잎이 무성한 나무들만 우거졌는데, 비까지 내려서 정자에 앉아 시골집 낭만마저 누려볼 수 없었다.


마당 앞 저수지의 연잎들은 불어난 물에 얼굴이 잠겼다 나왔다 하느라고 아직 꽃대를 밀어낼 여력이 없나 보다.


시골집이라 하니 색다른 뭔가가 있을까 기대를 하고 찾아왔을 문우들에게 괜히 미안하다.

감자는 삶는다고 태워서 내놓고, 얌전 빼고 앉아서 찻물 끓여 대접할 줄도 몰라 어영부영 때웠다.

자기들이 사들고 온 간식도 풀어놓고 환한 웃음만 한 보따리 내려놓고 떠났다.


점심은 책방지기 모니카 님이 빵빵한 글 값으로 턱을 내고, 차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며 멋쟁이인 미란샘이 호텔에 딸린 카페로 데려가는 바람에 촌스런 노인네 엄청 쪽팔렸다는 이야기이다.


몇 년 전에 받아본 치매검사 다시 받아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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