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버킷리스트로 두고 있던 해외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도 어느덧 두 달째가 되었다. 불광동의 동생집에 얹혀살면서 매일 취업공고를 찾고 이력서를 썼다. 보잘것없는 이력서가 수십 번의 서류탈락의 과정을 통해 세련되어 갔다. 간간이 면접까지 올라가는 경우가 생겼다. 아쉽게도 그것뿐이었다.
매일 근처 구립도서관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교양도서를 읽고 시사정보도 얻었다.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취업실패에 책 읽는 시간도 죄스럽게 느껴졌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남자가 중고 신입을 목표로 취업을 하는 것은 정녕 낙타가 바늘구멍 찾는 격이었다. 원래 경력이 있던 분야가 아닌 전혀 다른 분야로 방향을 정하니 나이가 많아 부담되는 신규지원자일 뿐이었다.
구직 석 달째가 다 되었을 때 공무원 시험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수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준비를 했던 반년의 세월이 있었다. 어쭙잖은 마음으로 공부하던 때지만 이제 그때와 다르게 절실한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오랫동안 고배를 마시다가 몇 년 만에 공무원에 합격해서 울산에서 근무하고 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야, 오랜만이다."
"그래, 웬일이고 잘 지내나?"
"어, 잘 지낸다. 다른 게 아니고 한 가지 물어보려고 전화했다."
"뭔데?"
"내가 다시 9급 공부를 해보려고 하는데... 시험에 합격한 니 생각에는 내가 어느정도 공부하면 붙을 수 있겠노? 대학교 때 내 모습을 니가 잘 아니까 물어본다."
"음..."
친구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얘기했다.
"너라면 1년만 다잡고 공부하면 합격할끼다."
친구에게 전화하기 전에 둘러본 인터넷 공시생 까페에 중고로 나온 공무원 교재를 싸게 팔겠다는 판매자가 있었는데 당장 가서 사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취업한다고 해놓고 공무원시험은 와?"
"서른 넘으니까 재취업이 힘드네. 서류 넣으면 대여섯번에 한번꼴로 면접은 가는데 계속 떨어진다. 공무원 시험은 그래도 나이 가지고 떨어뜨리지는 않잖아. 니가 1년 바짝 공부하면 합격한다고 용기를 줬으니 제대로 한번 해보려고."
친구의 격려 몇 마디를 더 듣고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중고책 판매자에게 연락해 행정직 교재를 전부 샀다.
다음날부터 도서관에 가는 책가방이 두툼해졌다. 늘 가던 자료실이 아닌 열람실로 향했다. 책을 붙들고 씨름을 했다. 내용이 생소했다. 몇 년 전 공부했다고 해도 그 지식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만 앉아 있으면 졸렸다. 물병에 정수기 물을 받아 졸릴 때마다 마셔도 한번 온 잠은 한참을 괴롭혔다. 공부는 엉덩이 힘으로 하는 건데 자꾸 바람을 쐬러 일어났다.
점심을 먹고 나면 신문을 보던 자료실에서 신착도서를 보던 1시간을 허비했다. 집중이 안될 때마다 옥상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또 몇십 분을 보냈다.
'내 처지가 이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닌데...'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이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간단히 식사를 하고 노트북을 켰다. 뉴스들을 뒤적이다가 동생이 퇴근하면 오늘 있었던 얘기를 나누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공무원 공부를 하면서 이력서를 계속 넣고 면접도 가는 날이 이어졌다. 면접에 오라는 문자가 오면 그날 공부는 어찌 그리 잘 되는지 몰랐다. 면접을 보고 와서 결과를 기다릴 때는 설레는 마음에 공부는 뒷전이었다. 면접 탈락 문자가 오면 땅이 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시간부로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자 처음 시작할 때나 몇 주가 지나고 나서나 지식의 정도가 별 차이 없었다. 이력서도 내가 가고 싶은 회사에만 넣던 것이 채용공고만 뜨면 업종 불문하고 넣게 되었다. 면접 탈락도 계속되니 흔히 회복탄력성이라고 부르는 보호막이 전부 깨져버렸다.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지속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건대 그 당시 나는 공무원 시험으로 다시 한번 도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떤 공부 건 시작할 때는 반드시 다른 모든 욕망을 제거하여야 한다. 이력서 넣는 것, 면접 보는 것, 자료실에서 신착도서를 보는 것, 신문과 뉴스를 보는 것 이 모든 것들을 단숨에 끊어야 하는 것이다. 이 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아무리 공부계획을 멋지게 짜던, 잠을 깨기 위해 물병에 물을 채워 넣던, 아침에 일찍 가서 열람실 구석자리를 차지하던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