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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Jbenitora Jul 23. 2022

취업은 내일의 나에게 맡긴 시절 이야기

 2022년 4월 기준 대한민국의 실업률은 3.0%로 5년 전인 2017년보다 0.7% 낮아졌고 청년실업률[(15~29세 실업자/ 15~29세 경제활동인구) × 100]은 7.4%로 5년 전의 9.8%에 비하면 눈에 띌 정도로 낮아졌다. 그러나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32만 명에 달하는 미취업 청년들이 있다.


 대학생이 되면서 막연히 고위 공무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행정고시나 외무고시를 합격하면 5급 사무관이 되는 길이 있었다. 군대 시절까지 합하면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할 최소 6년의 시간도 있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 그동안 공무원이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은 1차 시험인 PSAT를 2주 공부하고 쳐본 것 밖에 없었다. 합격 성적이 되지도 않았지만 합격했어도 당락에 결정적인 2차 시험에 대한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졸업까지 1학기밖에 남지 않았다는 위기감이 언뜻 들었다. 고시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고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시간을 그냥 보내기는 그래서 토익공부를 하기로 했다. 토익점수는 그 당시에도 상당히 유용한 스펙 중 하나였는데 삼성이나 LG와 같은 대기업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인문계 기준 730점 정도의 커트라인이 있었다. 취업에 전혀 흥미가 없었지만 다른 친구들이 2학기에 있을 졸업예정자 대상의 공채를 위해 공부를 하는 것에 자극을 받았다. 방학 동안 학교 기숙사에 남아 몇 주동안 토익 특강을 들었다. 특강 후 친 시험은 600점 대를 기록했다. 정확한 목표가 없다 보니 열정이 없었고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9월에 개강한 마지막 학기는 쏜살같이 지나갔다. 토익은 공부는 더 하지 않은 채 매달 시험만 치니 700점대로 올라서질 못했다. 본격적인 고시공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고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은 군대 가기 전에 받았던 처참한 성적을 조금이나마 만회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대학생활에 변명을 하자면 당시의 나는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았다. 뭐든 경험해보는 것을 좋아했고 다양한 분야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관심분야의 지식은 누구와 비교해도 자신이 있었다. 생각만큼 성적이 잘 나오지 않을 때는 학교 성적과 실제 지식의 질과 양은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이 많기에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의 최저치를 못 맞춰도, 고시공부를 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었다.


 학기 중에 다음 해 2월, 나와 같은 시기에 졸업하는 형들과 동기들이 하나씩 대기업 공채에 합격하기 시작하였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 졸업이 빠른 같은 과 남자후배 한 명도 서울대 대학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법학부 졸업예정자들은 이미 고시생이 되어 학교 수업 외에는 학교가 마련해둔 고시 전용 강의실에서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고시공부도 취업도 모두 못하고 어영부영 학교를 졸업하였다. 평균학점 3.25, 토익 성적 680점이 나의 스펙이었다. 삼성과 LG 등의 대기업은 졸업생은 거의 뽑지 않기 때문에 이제 공부해서 토익 점수를 올린다고 하더라도 갈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아직 5급 공무원의 환상 속에 있었기에 아쉬움은 1도 없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서 드디어 책에 손을 댔다. 5급 시험은 과목의 수가 많기도 했지만 한 과목당 봐야 할 책의 두께와 권수도 만만찮았다. 며칠 집에서 공부를 해보고 이걸 1년 공부해서 붙는다는 것이 과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에서 본 기사가 떠올랐다. 9급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일을 하면서 준비하여 7급에 합격하고 또 몇 년 준비해서 5급에 합격하였다는 기사였다. 9급 행정직의 과목수와 합격률을 검색하였다. 5급에 비해 이미 틀이 정해져 있고 문제가 모두 객관식이라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집에서 며칠을 보내는데 부모님의 눈치가 따가웠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대학 등록금을 전액 내주었고 졸업까지 해서 응당 자립을 해야 할 녀석이 집에서 놀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 퇴직이 2년 앞으로 다가온 때였다. 부모님께 무릎 꿇고 당장 취직할 생각이 없음을 알리고 염치없는 부탁을 드렸다.

"저는 공무원이 되고 싶습니다. 대학 다닐 때 미리 준비하지 못 한 바람에 집에서 공부를 해야 되는 점 죄송합니다. 올해 1년 동안 국가직, 서울직, 지방직 3번의 공무원 시험이 있는데 이 시험을 칠 때까지만 이해해주십시오. 합격을 못 한다면 어떤 기업에라도 취직하여 손 벌리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부모님은 공부하겠다는 자식에게 차마 더 이상의 말은 못 하고 알겠다는 말씀만 하셨다.


 베개 높이만 한 9급 공무원 교재를 들고 도서관으로 출퇴근했다. 도서관에 사물함 신청을 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이 모인 인터넷 사이트에서 같이 공부할 친구도 2명 모았다. 우리는 서로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해이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점심때 식사를 같이 하면서 공무원 시험 준비의 노하우를 공유하기도 하였다. 집과 도서관만을 오가는 생활에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동지였다. 이렇게 한 달간 공부를 하다 보니 처음에는 흰색은 종이요 검은색은 글이었던 행정학의 개념이 조금씩 잡히기 시작했다.


 국가직 시험이 있는 4월이 되었다. 시험의 유형과 지금껏 공부한 지식이 어느 정도 먹힐지 알아볼 겸 응시를 하였다. 시험장 앞에는 공무원학원에서 나온 사람들이 연필과 학원 전단지를 넣은 투명홀더를 나눠주었다. 고사장은 교실마다 사람들이 미어터졌다. 5지선다형으로 나오는 문제는 역시나 굉장히 헷갈렸고 절반 가까이 확신 없이 정답을 체크하였다.

'책을 씹어먹듯이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합격선과는 거리가 멀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험 유형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제 남은 9급 시험은 6월에 있는 지방직 시험 하나였다. 서울직은 서울에 살지 않아도 칠 수 있었지만 그해는 시험일이 지방직과 겹쳐서 둘 중 하나만 칠 수 있었다. 서울직은 포기하고 지방직 시험을 치기로 하고 공부에 돌입하였다. 공부방향을 다독(多讀)하기로 바꾸었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빠르게 1독 하고 모르는 것은 다음 읽을 때 보완하였다.


 따뜻하고 활기 넘치는 봄날을 도서관에서 보내려니 힘이 들긴 했지만 견딜만하였다. 이때가 아니면 해보지 못할 생활이었다. 어느새  달이  지나 지방직 시험일이 되었다. 2달간 도서관에서 대부분을 보냈기에 국가직 때와는 지식의 양과 자신감이 달랐다. 그렇게 수험장에 들어섰는데 나올 때는 허탈했다. 지방직 시험은 국가직에 비해  지엽적이고 공무원 생활에 하등 도움이   않은 문제들이 많았다. 국사시험은 교재에 나오지 변두리 사건을 다뤘고 행정시험은 문제를 꼬고  꼬아 놓았다. 응시생이 많아 변별력을 가져야 한다지만 상식을 중시하는 내게는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은 정도였다.

'이런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받아서 공무원이 되면 뭐 하나'


 지방직 시험을 합격선과 5점 차이로 떨어졌다. 아쉽지가 않았다. 공무원 시험이 진정 사회와 국가, 지방의 발전을 위해 봉사할 사람을 뽑는 시험인지 알 수없었다. 한 번든 회의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년까지 지금 페이스로 공부하면 9급 합격은 가능하겠다는 계산이 나왔지만 더 이상 공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책을 모두 팔았다. 같이 공부하던 친구 2명은 합격할 때까지 계속 공부를 한다고 했다.


 가족과 사회의 시선에서 나를 보호해주던 공시생이라는 허울이 벗겨지자 백수 하나가 덩그러니 남았다. 6월 지방직 시험을 치기 전에 동생과 7월에 5일간 일본 간사이 여행을 가기로 계획해둔 것이 있었다. 마지막 사치를 누리고 구직에 돌입하기로 했다. 짧은 일본 여행을 마치고 부산항에 도착해 휴대폰을 켜자 문자 폭탄이 쏟아졌다. 그중에 서류가 통과되었으니 면접을 오라는 문자가 있었다. 일본 여행 며칠 전에 TV를 보다 방송국에서 사람을 모집한다는 구직 자막을 보고 이력서를 급하게 써서 넣었는데 그 합격 문자였다. 본격적으로 구직활동을 하기 전에 처음으로 써본 이력서가 덜컥 서류에 합격한 것이었다. 면접일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여행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참여할 수도 없었을 인생 첫 취업 면접에 편하게 임했다. 여기에서 떨어져도 구직은 이제 시작이기 때문이었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면접시간에 맞게 도착했다. 대기실에는 나보다 2명이 먼저 와 있었다.

'3명이 전부인가?'

조금 기다리니 대기실 옆 회의실 문이 열리며 3명이 나왔다. 대기실의 우리 앞에 3명의 지원자가 더 있었고 그들이 막 면접을 마친 것이었다. 경쟁률이 6:1로 올랐지만 기본 100:1의 공무원 시험 경쟁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대기실의 3명의 이름이 불리자 차례로 회의실에 들어갔다. 우리는 각자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면접관들은 나이 지긋한 2, 임원으로 보이는 1명과, 관리자급 1, 인사담당자 1 해서  5명이었다. 자기소개부터 시작했는데  번째 지원자는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준비된 멘트를 하였다. 면접이 처음이라 따로 소개 멘트를 준비하지 않았던 나는 그제야 이런  준비해야 됐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행히도 3번째에 앉아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하는 소개를 들으면서  자리에서 소개 멘트를 만들어 무사히 넘길  있었다.


 면접 질문 여러 개를 거치면서 같이 참여한 지원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지원자는 영어점수가 아주 높았고 실제 영어 구사에도 막힘이 없었다. 다른 회사의 경력이 있었고 나보다 서너 살 많았다. 두 번째 지원자는 토익점수는 없었지만 학교 성적이 높았고 모든 질문에 술술 대답하였다. 연배가 비슷했고 침착하였다.


 면접관들은 시간을 들여 질문하면서 우리를 꼼꼼히 살폈다. 첫 번째 지원자에게 많은 질문이 쏟아지기에 마음을 비우고 있는데 임원으로 보이는 1명이 내게 물었다.

"일본어 조교 경력이 있는데 일본어는 좀 합니까? 일본어로 간단하게 자기소개든 뭐든 해볼 수 있습니까?"

오랜만에 주어진 질문에 일단 아무 말이나 하고 보기로 했다.

 "저는 일본어를 중급까지 배웠고 교수님을 돕는 조교 생활도 하였습니다. 구마모토에 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으며 어제까지 5일간 간사이 여행을 하였습니다. 오사카는 볼 것도 먹을 것도 많았습니다. 저는 친구도 많고 여행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못 가고 있습니다. 언제든 기회가 되면 전국을 도보여행을 하면서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친구들의 집을 방문해 하루씩 묵어 볼 것입니다."

잘 생각이 안나는 단어는 만들어 내다시피하면서 일본어를 내뱉었다. 일본어 말하기를 시킨 임원은 "욕한 것은 아니지요?"라며 웃었고 경직된 분위기가 풀렸다.


 이후 내게도 질문이 몇 개씩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토익 점수가 680점이던데 출신 대학에서는 낮은 점수 아니에요? 거긴 영어로 수업을 진행한다고 들었는데..."

"네 맞습니다. 제가 토익 공부를 한지가 얼마 되지 않아 점수가 낮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친 시험은 700점이 넘고 대학을 다니면서 영어로 하는 전공 수업을 무리 없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중소기업이기 때문에 영업파트로 발령받을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저는 이제 사회에 발을 내딛는 입장입니다. 어떤 일이라도 할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고 뭐든 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질문과 답이 오가고 시간이 다 되어 갈 때 나이 지긋한 면접관 1명이 물었다.

"그럼 우리 방송을 소비자들에게 판매를 한다고 했을 때 어떻게 팔 건가요?"

"저는 우리 방송을 안 보는 소비자들을 일일이 방문해서 우리 방송의 장점을 알리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상품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도록 직접 써보고 분석하겠습니다."

"아니, 소비자들이 우리 방송을 보도록 하려면 어떻게 판매해야 할까요?"

같은 질문을 몇 번을 물었는데 나는 첫 번째 대답을 반복해서 하였다. 듣고 있던 다른 면접관이 풀어서 설명을 해주었지만 결국 나이 지긋한 면접관을 만족시킬 대답을 하진 못하였다.


 면접시간이 끝나고 우리 3명은 밖으로 나왔다. 채용담당자는 엘리베이터까지 따라 나와 인사하며 결과는 3일 내에 알려준다고 하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다른 두 사람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그들은 같은 지원자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낯설었는지 "아 네" 짧은 대답을 하고 제 갈길을 갔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취업 면접을 본 느낌에 취해있었다. 면접을 잘 모고 못 보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다른 곳에 면접을 가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왔다.


 며칠 뒤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최종 합격이 되었으니 건강검진을 받고 서류 몇 가지 준비해서 언제까지 출근하라고 하였다. 얼떨떨했다.

'이렇게 사회에 발을 내딛게 되는 거구나!'

이제부터 부모님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 더 이상 부모님의 품 안에서 보살펴지던 공시생의 탈을 쓴 백수가 아니었다. 나를 알아봐 준 방송국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나 당시 면접장에 있었던 인사담당자에게 어떻게 내가 뽑혔는지 물었다. 그는 일본어를 자신감 있게 얘기했던 모습과 영어성적이 낮다고 해서 주눅 들지 않은 모습이 긍정적이었다고 말했다.

"영업 관련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못한 것은 영향이 없었나요?"

"그건 네가 잘 모르는 영역이기도 하고 입사해서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아!"

나는 그렇게 취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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