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은 해방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있다. 대중매체가 만든 이미지이다. TV 드라마 주인공들은 현실에서 도피할 때마다 오픈카를 타고 강릉으로 향했다. “난 너와 같은 차를 타고~ 난 너와 같은 곳을 보고~”라는 가사의 낙원이라는 노래에도 정신없이 달려온 곳은 동해안이다. 강릉이라 지칭하진 않았지만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를 정신없이 달려가면 그 끝은 강릉이다.
그리 크지 않아 시골 읍내 같은 강릉 시내를 거쳐 경포호수에 들어서면 해변에 늘어선 숙소들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림처럼 날고 있는 갈매기가 보인다. 건물 위에 배 한 척을 올려놓은 ‘스카이 베이 호텔 경포’는 머리칼이 쭈뼛서는 서늘한 날씨 속에서도 여기가 싱가포르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세련된 인상을 남긴다. 뒤편에는 호수가 앞편에는 바닷가가 펼쳐지니 경포대가 왜 천혜의 관광지이자 해방의 장소가 되는지를 알 만하다. 여름에 온다면 더 좋겠지만 사람이 적은 겨울의 언저리도 좋다.
낮의 설렘과 다르게 강릉의 겨울밤은 쓸쓸하다. 식당들이 일찍 문을 닫고 편의점 불빛만 가득하다. 관광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바닷바람이 울음소리를 내고 거리는 차갑게 식어있다. 어슬렁 거리는 밤 고양이 한 마리 없다. 아늑한 숙소의 난방이 없다면 귀향이라도 온 느낌이다.
차분한 밤을 보내고 여명이 밝아오는 시간에 일어나 강릉을 느껴보기로 한다. 눈에 물만 묻히고 숙소를 나선다. 간밤의 바람은 잦아들어 살랑거리고 있지만 파도는 바람의 강도의 몇 배로 귓전을 때린다. 강릉이라서, 낯선 땅이라서, 어렴풋한 햇빛 사이로 보이는 파도치는 풍경이 의미가 있다. 모래사장을 따라 아래로 걷는다.
다리를 하나 건너니 횟집들이 줄 서있다. 경포호수 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강아지 하나 겨우 지나갈 오솔길이 나온다. 길 끝에는 오솔길의 명랑함을 끊어 놓는 분주한 4차선 도로가 있다.
길을 건넌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길이 보인다. 경포호수 정수장 한 편의 샛길이다. 스멀스멀 고약한 냄새가 난다. 정수할 물 위에는 흰 거품이 가득하다. 하수구에서나 맡던 냄새가 지독하다. 불현듯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강릉 호수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보이지 않는 정수장의 존재 덕분이구나.’ 고마운 마음이 들자 냄새가 한결 견디기 쉽다.
경포호수가 지척에 보인다. 호수로 가는 길의 작은 개울을 다리가 이어주고 있다. 난설헌 교(橋)다. 조선시대에는 강릉을 대표하는 두 여인이 있었다. 성리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과 바로 이 다리 이름의 주인공 허난설헌이다. 꽤 오래전에 ‘포천’이라는 웹툰을 읽은 적이 있었다. 만화의 주인공은 애꾸눈 점쟁이 이시경이지만 진짜 주인공은 그의 딸인 초희였다. 작가가 일부 창작한 이야기 속의 어린 초희는 자신의 생각이 똑 부러졌다. 그러던 초희가 이시경의 친구 허엽의 집에 맡겨지고 난설헌이 되었다. 양갓집 규수로 지내야 했기에 시집갈 나이가 되자 시대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 그려졌다.
실제의 허난설헌 역시 이런 시대를 원망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세 가지 한이 있다.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서 태어난 것, 남편의 아내가 된 것이다.” 그녀가 스물일곱 짧은 생을 살면서 틈틈이 쓴 글들은 동생 허균의 손에 의해 청나라로 전해졌다. 그 글을 본 청나라 문인들은 늘 난설헌을 한번 보기를 꿈꿨다.
난설헌 생각을 하다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는 스물넷 꽃다운 나이에 나를 낳았다. 이듬해 동생을 낳았다. 그 시절 어머니들이 으레 그랬듯 우리가 말하고 뛸 수 있게 되자 맞벌이를 하셨다. 매일 밥때가 되면 상을 차려야 했다. 교대근무로 바쁜 아버지의 몫까지 아이들을 챙겨야 했다. 동네 아이들과 늦게까지 노는 애들을 달래서 집으로 데려와야 했다. 애들이 어질러 놓은 방을 혼자 치워야 했다. 한 살 터울이라 허구 헌날 싸우는 아이들을 달래야 했다. 우리 가족뿐 아니라 시댁도 챙겨야 했다.
어머니는 집안의 막내며느리로 제사마다 참여했다. 명절마다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애들 챙겨 시골 큰집으로 내려가야 했다. 시어머니와 나이는 45살도 더 차이가 났고 큰 형님과는 15살, 작은 형님과도 10살의 나이 차가 있었다. 어머니는 그 누구에게도 힘들다 내색할 수 없었다. 정제(부엌)에서 부뚜막을 맡아야 했고 서투른 솜씨지만 형님들이 시키는 데로 남자들 밥상을 챙겨서 끼니마다 대령해야 했다.
어느 명절날 나와 동생이 큰집 마당과 방을 종횡무진 뛰어다니고 있었다. 소죽을 끓이고 장작을 패 놓는 아침 일과를 마치고 쉬고 있던 큰아버지가 그런 우리를 보고 소리를 지르셨다. “이 마노무 손들(망할놈들), 조용히 좀 하거라!” 내 기억에 이 말투는 정말 짜증 나서라기보다는 좀 조용히 놀라는 투정 섞인 말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얌전히 부엌일을 하시던 어머니께서 집안의 장남이자 어머니보다 20살은 더 많은 큰아버지에게 소리치신 것이다.
“아주버님, 너무하시네요. 남의 집에 세 들어 살면서 눈칫밥에 마음껏 뛰지도 못하던 애들이 시골에 와서 모처럼 뛰어다니는데 그것도 못 참아 주십니까? 애들이 원래 뛰어다니는 거지 그게 그렇게 시끄럽습니까? 좀 놀게 놔두세요.”
80년대 당시 집안의 서열 꼴찌인 막내며느리가 서열 1위나 다름없는 큰아버지께 대든 것이었다. 큰아버지는 머쓱했는지 담배를 피우러 나가셨고 어머니도 잠시 자리를 뜨셨다. 어느 귀퉁이에서 울고 오셨던 것 같다.
어느새 해는 높이 떠서 방긋 웃고 있다. 경포호수 길을 돌아 숙소로 향한다. 바람은 잦아들었고 적막을 만들던 어둠은 사라져 휴양지의 모습을 되찾았다. 강릉의 명(明)이 다시 암(暗)을 삼키고 있다. 강릉이 해방의 도시로 다시 돌아온 듯하다.
산책길 곳곳에 허균이 쓴 소설 주인공들의 동상이 서있다. 허균은 생전에 누나인 난설헌을 누구보다 아끼고 좋아했다. 난설헌의 시가 쓰인 돌이 보인다.
“가을의 맑고 긴 호수엔 벽옥 같은 물이 흐르고
연꽃 우거진 곳에 아름다운 목련배 매여 있네
임을 만나 물 사이로 연밥을 던지다가
멀리 사람들이 알아보아 반나절이 부끄러웠네”
연꽃을 따며 부르는 노래인 ‘채연곡(采蓮曲)’이다. 7언의 한시를 한글로 풀어놓은 그녀의 시가 길을 따라 몇 편 더 쓰여 있었고 하나같이 애틋했다. 허난설헌은 남자들의 역사라 불리는 조선의 역사 속의 희생자였으나 척박한 환경 속에서 글로서 예술을 만들어간 개척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삭히고 삭힌 조선 여인의 한을 아름다운 글 속에 녹여냈다.
강릉과 허난설헌처럼 어느 곳이나 명과 암은 공존하는 법. 한 가정이 꾸려져 자리를 잡아가는데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희생이 있었다. 가부장적 세태 속에서 꾹꾹 눌러 담은 설움이 간혹 삐져나오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아니면 지금의 여유로운 내 삶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묵묵히 안 보이는 한켠에서 활약하는 정수장처럼 그렇게 허난설헌도 어머니도 아름다운 경포호수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생을 살았고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