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
누군가는 MBTI가 쓸모없는 시간낭비라고 말한다. 그런 거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고 하는 연예인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영웅처럼 묘사된다.
개인적으로 MBTI는 유용한 도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조직생활을 하면서 상식으로 전혀 이해가 안 되는 동료직원들을 만나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어쩜 이렇게 나와 생각이 다를까?'
수년의 고민으로도 풀리지 않던 이런 종류의 의문은 MBTI를 알고 나서 꽤 시원하게 풀렸다. 16개로 분류된 것 중 하나인 상대의 성향을 알고 나니 그 행동을 야기한 상대의 생각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기준에는 MBTI를 모르고 알생각도 없다던 그 연예인은 조직생활의 고수이거나 조직생활에서 힘든 일을 겪어보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나와 아내는 그런 MBTI 성향에서 하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똑같다. 대부분의 성향이 같은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잘 읽을 수 있다. 특히 아내는 내가 말의 서두만 꺼내도 어떤 의도로 얘기를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한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랬고 함께 한 세월이 10년이 넘어가는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우리끼리만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의사소통을 할 수도 있다.
딱 하나 극과 극으로 다른 성향이 있는데 바로 외향(E)과 내향(I) 성향이다.
나는 사람들과 말하기를 좋아한다. 대화를 통해 경험을 넓히고 배움을 얻는다. 정말 몸이 힘든 때가 아니면 사람들과 어울리는 쪽을 택한다. 그래서 결혼 초기에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입을 닫아버리는 아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반면 아내는 혼자 꽁냥 거리기를 좋아한다. 여유만 되면 집안에 박혀서 이것저것을 계획한다. 스마트폰만 보고 하루종일 말없이 침대에 누워있기도 가능하다. 그런 아내는 내가 별 목적도 없이 생판 모르는 사람과 앉아서 영양가 없어 보이는 얘기를 한참 나누는 모습을 이해 못 하며 택시를 탈 때마다 기사님에게 먼저 말을 거는 모습을 신기해하였다.
우리는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기 때문에 간혹 의견차이가 생겨도 별 다툼이 없다. 다툼이 생길 것 같으면 많은 경우 말수가 적은 아내 쪽에서 감내를 한다.
얼마 전 외부 미팅이 있어서 차를 타고 나가려고 시동을 켰다. 우리 식구는 차 운전석 머리 위 서랍장(루프콘솔)에 카드를 3장 넣어둔다. ㅋ마트 회원카드, ㅎ사 주유카드, 생활비카드가 그것이다. 원래 있던 대로 모든 것이 있는지 확인하며 루프콘솔에 손을 넣었는데 카드가 2장밖에 없었다. 생활비카드가 제자리에 없었다.
차를 쓰는 사람은 아내와 나밖에 없으니 즉각 아내에게 전화했다. 업무 중이라 바쁜 아내는 신호가 꽤 울린 뒤 받았다. 조바심에 동동 거리다가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쏘아붙였다.
"차에 생활비 카드가 없어요. 어디 있어요?"
"몰라요. 잘 찾아봐요."
"그때 선생님이 마지막에 썼잖아요."
"옷 주머니에 넣어뒀던가? 집에 가서 찾아볼게요."
"오늘 나가면 주차비를 그걸로 계산해야 하고 우유랑 계란도 나간 김에 사 와야 하는데 생활비카드를 제자리에 안 두면 어떡해요."
아내가 퇴근하고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겠다고 말을 했는데도 내 할 말을 이어갔다.
"휴~"
아내는 다 듣고나더니 한숨을 지었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당장 생활비 카드가 없어도 지갑에서 개인카드를 꺼내 먼저 쓰고 나서 월말 정산할 때 받아도 되었다. 아내는 사무실 일 때문에 바쁘고 나도 외근 때문에 마음이 급한 상황에서 책망과 함께 장황하게 아내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카드를 어디에 뒀는지 대화를 통해 나왔으면 퇴근뒤에 찾아봐달라고 하고 거기서 끊어야 했는데...'
정적이 흘렀다.
"생활비카드 쓰면 꼭 있던 자리에 놔두세요."
정적을 견디기 힘든 성격의 내가 먼저 통화를 끝냈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개운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아내가 감내하였다. 미안한 감정과 함께 생각의 차이가 더 큰 갈등을 부르기 전에 이런 일을 방지할 대책이 필요했다.
앞으로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겨서 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대화를 하게 되면 3초를 기다리고 말하기로 하였다. 3초간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대화를 하는지', '침착한 상태인지', '상대를 비난하려고 하지 않는지'이 세 가지를 생각하기로 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부드러워진다고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이런 경험이 자기반성의 기회가 되면 맞는 말인 것이고 경험이 적거나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 틀린 말인 것이다. 사람의 성격은 변하기 어렵다. 내가 처한 사회에 맞춰서 갈등을 줄이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3초 세고 말하기는 아내와 성격의 차를 줄이고 나이에 걸맞게 부드러워지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