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보험
4월 말일이었다. 시설장님이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잠시 시간이 있냐고 물었다. 보통 그 시간에는 어르신들과 시간을 보내긴 하지만 시간이야 내면 되는 것이었다. 별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럼 은행에서 와서 브리핑을 한다고 하니까 20분만 같이 들읍시다."
"다른 선생님들도 모이라고 할까요?"
"아니요, 사무실 인원 3명만 들어도 괜찮습니다."
점심을 먹고 쉬고 있으려니 은행에서 사람이 왔다. 별도의 장소가 없다 보니 좁은 사무실에서 진행하기로 하였다. 시설에 방문해서 상품을 브리핑하는 기회를 얻는 대신에 무언가 기부를 하고 가는 영업형태를 알고 있기에 시간을 때운단 생각으로 편한 마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좁은 공간에서 랩탑 컴퓨터를 켜고 우리 앞에 선 그의 브리핑은 여느 강의와 별차이가 없었다. 간단한 퀴즈로 아이스 브레이크를 하면서 맞추는 사람에게 '스포츠크림'을 상품으로 주었다. 상품을 주고 우리의 경계심을 허문 그의 강의는 망설임과 뻘쭘함이 없었다. 짠순이로 알려진 유명 개그우먼의 재테크 전략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녀가 한사코 해지하지 않고 있는 상품에 대해 말을 했다. 복리로 계속해서 이자가 발생하는 그 상품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홀린 듯이 듣고 있었다.
"아까 보신 상품은 팔수록 은행에서 손해라 10년 전에 없어졌는데 올해 다시 한정 수량으로 재발매했습니다. 이번 판매 분량이 끝나면 다시 언제 다시 팔지 모릅니다."
그의 말에 이 기회에 꼭 가입하라는 의도가 들어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으니 고개만 끄덕였다.
"이 상품은 다음 달에 지점 창구에 가서 직접 가입해도 됩니다. 추석 전까지는 가입이 될 거니까요. 그렇게 가입하면 사은품으로 화장품이나 타월 같은 거 받으시겠지요. 제가 이곳에 방문한 것은 저를 통해 가입하시면 특별한 혜택을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은행에서 팔지 않는 복리 상품을 여기서 팔고 있다고 해도 가을까지 판매를 한다고 하니 마음이 급하지 않았다. 이거 하나 가입한다고 만기가 되는 15년 뒤에 갑부가 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가 준비한 특별한 혜택이 뭔지만 들으면 브리핑은 끝나고 업무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는 혜택으로 동남아 여행권을 꺼냈다. 최저 금액으로 가입하면 여행권 2장, 얼마 이상 가입하면 금액에 따라 1장씩 추가되어 최대 4장까지 준다고 했다.
동남아는 청년 시절 배낭여행으로 수도 없이 다녀왔던 곳이라 별 흥미가 없었다. 그가 숙박과 항공 모두 지원된다고 하면서 자신도 가족들과 작년에 다녀왔다고 하기 전까지...
아내는 미국과 일본은 몇 번을 다녀왔어도 동남아는 한 번도 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 터키와 유럽여행의 로망을 눈을 반짝이며 내게 얘기했었다. 그런 우리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어느새 그때로부터 10년이 넘었다. 같이 가보기로 했던 터키와 유럽은 꿈도 꾸지 못했다. 아이들 키우는 것도 빠듯한 생활비와 오래 비울 수 없는 업무특성 때문에 아내의 희망사항까지 챙길 수 없는 삶이었다.
'그래, 동남아라면 갔다 올 수 있잖아!'
다년간의 배낭여행 경험으로 동남아는 지금도 비행기를 온라인으로 예약하고 숙소를 현지에서 잡을 생각을 하면 훌쩍 다녀올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힘든 여행을 하기 싫어했다. 돈을 아껴가며 현지인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보다 유명 맛집을 찾아가고, 멋진 곳을 구경하고, 호텔에서 자는 것을 원했다.
그녀가 원하는 동남아 여행이 눈앞에 있었다. 항공과 숙박을 제공하는 3박 4일의 여행권이면 가족 여행이 가능했다.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은행직원은 여행권 4장을 지급하는 월 납부액을 확 낮춰 제안했다. 월 20만 원이 안 되는 돈을 15년간 납부를 한다면 여행권 4장을 손에 쥘 수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노후 대비는 필요하고 저 정도는 납부할 수 있는 형편이 되다 보니 더 고민이 되었다.
오늘을 넘기면 이렇게 드릴 수 없다는 그의 말에 결국 서명을 하고 말았다. 당연히 아내에게 전화를 먼저 하였는데 아내도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하였다. 서명을 하고 다시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신랑은 팔랑귀네요. 하하"
"나도 결국 서명까지 할지는 몰랐어요. 은행에서 잠깐 시간을 내달라고 하는 거 이거 함부로 볼게 아니네요."
"우리 사무실에도 찾아왔는데 여기는 아무도 가입 안 했는데 거기는 팔랑귀가 있어서 가입을 했네요."
"그러네요. 이제 나는 이런 일 있으면 외근을 나가던지 해야겠어요. 크크크"
은행직원은 가입신청서를 받아서 현장에서 상품 등록을 하였다. 가입일에 1차 납입하고 한 달 뒤 2차 납입하고 나면 여행권이 발송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은행직원은 떠났다.
한 달 보름이 흘렀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여행권이 사무실로 배달되었다. 여행권에 적힌 유의사항을 읽어보니 1인당 25만 원의 추가 금액을 내야 하고 현지에서 쓸 비용은 별도로 준비해야 했다.
'그럼 그렇지, 전부 무료이진 않겠지. 항공비와 숙박비 해서 25만 원이면 괜찮지 뭐.'
자기 합리화를 거쳐 여행권 4장은 우리 가족 여권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은행 상품가입으로 인해 추가로 들어가게 될 생활비를 버는 것도, 가족들과의 동남아 여행의 시기를 살펴보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넘어가지 않을 자신감으로 브리핑에 참여하였지만 끝나고 나니 나는 한낯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다. 이 일로 정확하게 내가 팔랑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석 달간은 바쁜 시즌이다. 컨설팅과 심사 수요가 몰리기 때문에 내 본업인 경영지도사로 주로 활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업인 사회복지사 업무를 대폭 줄여놓았다. 이제 열심히 업무에 몰입하여 새로 생긴 지출에 대비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