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에는 친구집에 가서 같이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는 것이 그렇게 즐거웠다. 주택에 살 때는 아파트에 사는 친구집의 넓은 거실을 부러워하기도 하였고 열쇠로 문을 여는 구축아파트에 살 때는 신축아파트의 자동문을 보며 신기해하기도 하였다.
대학시절에는 서울에 사는 친구집에서 묵고 입영을 하기도 하였고 대구 친구집에서 친구동생과 누가 키가 큰지 재보는 등 소소한 추억을 만들었다.
취업을 하고는 친구집에 갈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하여 신혼집에 놀러 가기가 어려웠고 결혼 안 한 친구들도 부모님께 얹혀 살기에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친구를 만난다고 함은 밖에서 식사 한 끼를 같이 하는 것을 의미했다. 예전에 어떤 주제로 얘기를 해도 밤새 얘기할 수 있던 청년들은 어디 가고 술 몇 잔 기울이면 집으로 가야 하는 중년들만 남았다.
매년 이맘때면 서울에서 심사원 교육을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날짜가 지정되어 참여하였다. 교육이 17시에 마치기 때문에 한참 얼굴을 보지 못한 친구에게 연락하였다. 친구는 반가워하며 마침 재택근무라 집에 있으니 자기 집으로 와서 근처 식당에서 밥을 같이 먹자고 하였다.
영등포 역부근에서 교육을 마치고 친구집이 있는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향했다. 친구집은 거기서 버스 두 정거장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데 초행길이고 걸어도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아 스마트폰 지도앱을 꺼내 보면서 걸었다. 20분 정도 걸어 친구집 주변에 도착했다. 양꼬치집을 비롯해 중국풍의 식당이 몰려있는 주택단지였다. 친구가 나와있었다.
"걸어오는 용기 칭찬해"
"생각보다 얼마 안 걸리네. 아침에 조깅을 빼먹은 대신에 걸은 거지 뭐!"
"그래?"
"응, 마침 전화하려 했는데... 반갑다."
6시가 되기 10분 전이었다.
이 친구는 대학교 때 일본어 수업을 같이 들은 인연이 있었다. 그 시절 일본의 구마모토에 단체 여행을 갔을 때 일본어를 제일 잘해서 우리 팀의 리더를 맡았던 친구였다. 며칠 전에 미야코지마를 다녀왔다며 맑은 바다 사진을 보여주는데 이 친구의 일본 사랑은 여전하구나 싶었다.
1시간 좀 넘는 시간 동안 양꼬치 3세트를 맥주 3병과 함께 해치웠다. 10년 만에 먹는 양꼬치가 얼마나 맛있는지 몰랐다. 부른 배를 안고 과자 몇 봉지와 큼직한 수박을 하나 사서 친구 집으로 향했다. 막차까지 3시간이 남아있었다. 친구집에서 놀 생각에 신났다. TV를 틀어놓고 수박을 썰어 먹으면서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보낼 시간이 기대되었다.
주택촌 입구에 있는 빌라 5층이 친구집이었다. 대문을 열면서 친구가 말했다.
"룸메이트가 있긴 한데 내가 미리 너 온다고 얘기해 뒀어."
'혼자 사는 게 아니었구나!'
친구가 거실에 불을 켜기 전까지 입구 방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룸메이트가 있다는 그 방은 책장에 책이 빼곡했고 앉은자리를 빼고는 방안에 짐들이 가득했다. 고양이를 품에 안고 이어폰을 끼고 뭔가를 보고 있는 그에게 최대한 방해되지 않도록 집에 들어갔다. 20평 남짓한 집에 룸메이트가 한방, 친구가 남은 한방을 썼다. 친구가 식탁과 연결하는 간이 테이블을 꺼내서 펼치고 의자를 가져왔다. 그리곤 수박을 잘라 한 접시를 룸메이트에게 가져다주고 한 접시를 테이블에 놓았다. 사 온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먹으며 우리는 현재 어떻게 지내는지부터 대학교 때 친구들이 지금은 뭐 하고 지내는지 등에 대해 조용히 얘기를 나눴다.
거실 책장에 꽂힌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책들과 그 아래에 박스가 뜯기지도 않은 채 쌓여있는 보드게임들, 유리로 된 장에 보관된 수많은 피겨들이 보였다.
'장가가지 않았다면 나도 이런 방에서 살고 있으려나?'
'호주에서 셰어를 얻어 살던 것과 다르지 않은 삶이구나!'
내가 이미 떠나온 삶과 다시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다시 돌아가라면 망설일 대학시절과 외국생활을 하며 사서 고생하던 때가 떠올랐다.
집값이 비싼 서울에서 셰어 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지만 마흔 중반에 작은 기업을 다니긴 하지만 차부장급의 업무를 하는 친구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은 충격이었다. 월급을 벌어서 부모님 용돈을 드리고 자신의 노후도 준비해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을 것이었다.
이 친구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어 했다. 혼자 살면서 해외여행을 가고, 그 기록을 페이스북에 남기고, 간간히 가까운 친구를 불러서 같이 요리를 만들어 먹고, 주말에는 자전거로 운동 겸 나들이를 가는 삶에 만족했다. 전산 관련 전공을 살려 현재 서버를 만지면서 별일 없이 흘러가는 삶을 좋아했다.
친구에게 물었다.
"죽기 전까지 꼭 해보고 싶다 하는 것 없어?"
"그런 거 없어. 그냥 적게나마 노후 준비를 하고 지금처럼 자유롭게 사는 거면 돼. 사실 난 지금 죽어도 아쉬운 건 없거든."
"그래? 나는 아직 해보고 싶은 것이 많은데, 부자도 한번 되어보고 싶고 말이야."
"물론 나도 지금이 한참 커리어의 정점을 찍는 때라서 만족하지만 노후에 대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정도는 해."
확실히 서로가 생각하는 삶의 목표가 달랐다.
학원 강사를 하면서 성공을 향해 뛰고 있던 대학 선배 집에 놀러 갔던 2008년도가 생각났다. 그 형은 투룸에 혼자 살았고 집에 물건들이 단출하였다.
"남자 혼자 사는 집 치고는 깨끗한데요. 형"
"여자친구가 한 번씩 집을 정리하러 와!"
하룻밤 신세 지던 그 밤에 자다가 살짝 눈을 떴을 때 내 눈에 거실 앉은뱅이 탁자에 앉아서 학원에서 쓸 교재를 집필하고 다음날 스케줄을 기록하던 형의 뒷모습이 보였다. 성공을 향한 열정이 느껴진 그 만남은 당시의 내가 직장 탈출의 의지를 키우는 역할을 했다.
친구 집에서는 그런 열정보다 황혼을 생각하는 현실적인 걱정이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그렇게 서로의 생각을 나누다가 막차시간 1시간 반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빌라입구에 세워둔 친구의 로드바이크를 구경하고 같이 버스정류장까지 걸었다.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가는 버스가 바로 왔다. 우리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나는 아직 욕심이 많고 친구는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가치관이 다른 우리가 각자의 삶을 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 우연히 만나도 웃으며 저녁 한 끼 할 수 있는,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을 때 전화번호를 누를 수 있는 이런 사이면 충분하다.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 담에 또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