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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Jbenitora Aug 15. 2024

새벽 5시 포항 출발 부산행 완행열차

신체검사받으러 가던 날

부산지방병무청이 부전역 앞에 있던 시절이었다. 밀레니엄을 50일쯤 남기고 세상은 들떠있었다.


대학생활을 1년 하고 친구들은 하나 둘 군대로 떠났다.

'어차피 보내야 할 세월이라면 군대는 빨리 가는 게 좋아.'

이런 생각을 가진 나는 정작 빠른 생일이라 친구들이 1학년 때 받았던 신체검사(신검)를 2학년이 되고서도 못 받고 있었다. 매년 신검을 받는 시기가 지역별로 달라지는데 내가 받는 해에는 하필 우리 지역이 가장 늦게 신검을 받았다.


군대 가기 전의 공백 시기를 공부보단 게임으로 보내고 있었다. 막상 대학에 와보니 통제하는 사람이 없었고 성적이 높지 않다고 졸업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1학년을 교양학부로 정해둔 학교의 방침은 적성을 찾으라는 취지와는 달리 허송세월하기 좋았다. 2학년이 되어 전공을 정해야 함에도 그다지 긴박하지 않았다. 복수전공이 필수였지만 학과는 언제든 바꿀 수 있었다. 굳이 군대라는 일생에 한 번뿐인 큰 이벤트를 남겨두고 열정적일 필요가 없던 것이었다.


학점의 관점에서 보자면 학교를 다니는 것이 의미 없는 2학년 2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11월의 어느 날에 병무청으로 오라는 한 장의 통지서가 날아왔다. 드디어 기다리던 신체검사 통지서가 온 것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군대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젊은 날을 바친다는 억울한 생각은 전혀 없었고 국가에서 먹을 것, 입을 것을 제공해 주고 잘 곳까지 준다고 생각했다. 일반인들이 돈을 내야 할 수 있는 사격이나 텐트를 치고 야외에서 자는 경험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군대는 나만 가나! 친구들도 다 가는데 얼른 다녀오고 치워야지!'


그렇다고 육군이 아닌 다른 군대를 갈 마음은 없었다. 굳이 힘든 해병대를 찾아 지원하거나 2개월 더 복무하는 해군, 4개월 더 복무하는 공군을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 장교나 부사관은 애초부터 제외였다. 남들 하는 대로 공부해서 대학을 갔던 것처럼 남들 하는 대로 군대를 가는 것이었다.


학교가 있던 포항에서 오전 9시까지 병무청이 있는 부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기차를 타는 것이 가장 좋았다. 마침 새벽 5시에 포항역에서 출발하는 완행열차가 있었고 종착지 바로 전역이 부전역, 바로 병무청 앞이었다.


학교에서 막차를 타고 포항 시내로 나와서 PC방으로 향했다. 매캐한 담배연기 속에서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켰다. PC방의 빠른 인터넷 속도에서 마음껏 멀티플레이를 하면서 '언젠가는 집에서 편하게 멀티플레이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라는 생각 했다. 기숙사에서 모뎀을 연결해서 대전을 하다가 전용선이 깔린 곳에서 하니까 그렇게 쾌적할 수 없었다.


4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고 PC방을 나섰다. 쌀쌀한 새벽바람은 담배연기가 배인 옷을 뚫고 살을 파고들었다. 흐리멍덩하던 정신이 바짝 긴장되었다. 낮에 가면 사람들로 번잡했던 시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컴컴한 새벽 4시 반의 거리에는 드문드문 지나가는 차가 있긴 하여도 걷는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는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5분을 걸어 포항역에 들어섰다. 당연히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플랫폼이 왁자지껄 했다. 그 주인공은 보따리를 이고진 할머니들이었다. 오늘 팔 물건들을 보자기에 싸서 넣어둔 붉은색 플라스틱 다라이(대야)를 머리에 인 할머니들이 열차에 오르고 있었다. 이 추운 날에도 장에 팔 물건을 챙겨 새벽같이 나온 할머니들을 마주 하니 조금 전까지 축 늘어지게 앉아 PC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내가 부끄러웠다.


'저 할머니들은 어디까지 가실까?'


열차가 출발했다. 열차는 완행이라 간이역마다 멈춰 섰다. 사람 하나 없을 것 같은 작은 간이역에도 보따리를 든 할머니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열차에 올랐다. 그렇게 경주역을 지나고 울산역을 지났다. 중간에 내리는 할머니는 없었다. 간간히 출근을 하는 듯한 젊은 사람들이 보이긴 했으나 기차에 오르는 승객의 대부분은 할머니들이었다. 칠팔십 대 노인들이 자기보다 무거워 보이는 짐을 들고 초겨울 쌀쌀한 그 새벽에 시장으로 출근을 하는 것이었다. 매일 보는 사이인지 중간중간에 올라오는 분들을 미리 앉아있던 분들이 반겼다. 느리게 이동하는 열차는 객차 바닥에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는 할머니들로 채워졌다.


열차에서 눈을 붙이려고 PC방에서 밤을 새웠는데 막상 열차에 앉으니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언 듯 보아도 무거운 짐들을 허리가 구부정한 분들이 들고 열차에 오르는 것이 충격이었다. 평소 내가 쉽게 흘려보냈던 시간들은 이 할머니들에게는 결코 쉽지만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었다. 따뜻한 이불속을 빠져나오기도 힘든 시간에 보따리 그득하게 팔 물건을 싸서 장에 갈 준비를 마치고 역까지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걸어오면서 어떤 마음을 하셨을지 짐작을 해보았다.


옆에서 내 모습을 보면 무심히 앉아 캄캄한 창밖을 내다보는 것 같았겠지만 내 머릿속은 요동치고 있었다. 지난 2년간의 내 행적이 부끄러워졌다. 부모님이 벌어 준 돈으로 비싼 학비를 내고 모자람 없이 용돈을 써가며 살았다. 아르바이트 한번 스스로 구해서 해보지 않았고 무엇 하나 잘한다고 남들에게 자랑할 것도 없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난 미래의 나에게 매일 빚지고 있었다.


짧은 스무 해의 인생을 반추해 보는 사이 해가 떴고 열차는 부전역에 도착했다. 할머니들이 앞다퉈 내렸다. 나는 그분들이 다 내리고 나서 플랫폼에 발을 디뎠다. 신검 시간에 아직 여유가 있기도 했지만 짐보따리를 이고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마음속에 각인하기 위해서였다.


'내 평생 오늘을 기억하며 살겠어!'


개인적으로 새벽을 여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직접 대면한 그날은 더 이상 보살핌만 바라는 어른아이가 아닌 스스로 서는 진정한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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