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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Jbenitora Nov 12. 2024

서면 한복판에서 이것이 벌어진 날

부산 서면은 여러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부산의 최고 번화가 중 한 곳, 대중교통의 집합소, 주말에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곳, 차 댈 곳 없는 곳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여러 군데의 의뢰를 받아 일을 하다 보면 서면에 컨설팅이나 심사를 하러 갈 일이 생긴다.

"심사원님, 이번 장소는 서면의 OO입니다."

"네, 시간 맞춰가겠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다이어리에 스케줄을 적으면 일을 잘해야겠다는 책임감과 함께 곤란한 마음이 올라온다.


그 마음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생긴다. 일단은 서면을 가기 위해서는 황령터널을 지나야 한다. 황령터널 앞까지는 집에서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 잘 뚫린 동해안고속도로와 광안대교 덕을 본다. 그렇게 신나게 달려 터널 언저리에 도착하면 여기서부턴 30분 정도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 흔하다. 길이 2km도 안 되는 이 구간은 상습정체구역이기 때문이다. 출퇴근시간뿐 아니라 낮 시간 언제라도 거북이걸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차량들을 비집고 서면에 들어서면 주차할 곳을 찾기가 어렵다. 골목마다 차들이 빼곡하다. 부산은 특히 노란 선 주차에 아주 엄격해서 잠시 주차해도 과태료를 각오하여야 한다. 그러니 공영주차장도 댈 자리가 없고 비싼 주차비의 민간 주차장도 차량들이 가득 들어차있다. 부산에 갈 때마다 경차를 이용하지만 민간 주차장은 경차 할인을 해주는 곳도 잘 없으니 별 이점이 없다.


주차난과 비싼 주차비 때문에 울산에서 서면까지 전철을 타고 가자니 차를 역에 주차를 해두고 환승을 해가며 2시간에 가까운 여행을 해야 한다는 점도 망설여진다.


2년 전쯤 전, 박사논문을 한참 진행하고 있던 어느 날 설문조사를 완료하고 분석틀을 고르고 있었다. 가장 많이 쓰는 SPSS를 쓰면 되겠지만 AMOS가 쓰기가 간편하다고 해서 배워보기로 했다. 박사과정 수업을 같이 들었던 나이가 같은 한분이 흔쾌히 가르쳐 주겠다고 하여 만나기로 했는데 그 장소가 서면이었다.


대구에서 오전에 컨설팅 하나를 마치고 부산으로 이동했다. 대구에서 가다 보니 평소 가던 길과는 다른 길로 접근했는데 그쪽도 밀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서면에 들어와서 차 댈 곳을 찾아 빙글빙글 돌다가 서면 서쪽의 도로변 공영주차장에 자리가 하나 비어서 차를 대었다. 주차요원이 오더니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다. 2시간 정도 될 거라고 했더니 종이를 찢어주었다. 카드 결제기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부르는 게 값이겠구나 싶었다. 당장 약속시간이 임박했기에 받은 종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약속장소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10분은 족히 걸어 과거에 유명했다던 쥬디스 태화 백화점을 끼고 돌아서 서면 한복판에 들어섰다. 일본 어딘가에 서있는 느낌이 들었다. 1층에 대형 오락실이 있고 아기자기한 점포들이 모여있는 거리는 후쿠오카 시내에서 본 풍경이었다. 자주 가던 롯데백화점과 그 뒤편 식당가, 포장마차 거리와는 큰 도로 하나 차이인데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길은 낯설었지만 스마트폰 지도앱에 약속장소를 입력하고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 공무원학원에서 그분을 만났다. 서면에는 공무원 준비생을 위한 학원이 많은데 그분은 그런 학원에서 공시생들을 가르치는 강사였다. 평소에 직업을 물으면 이것저것 가르치러 다닌다던 어정쩡한 대답을 하던 그였는데 그게 학원 강사를 말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인사를 나누고 빈 강사 대기실에 들어가 노트북을 꺼냈다. 그는 내 노트북에 AMOS프로그램을 깔아주었다. 프로그램을 켜고 설문결과를 넣고 분석하는 것을 아이콘을 누르며 설명해 주었다.


배우는 것은 언제나 눈으로 볼 때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도 막상 혼자서 해보려면 안 되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라 최대한 자세하게 노트에 적었다. 아이콘의 모양을 직접 그리고 모르는 것은 하나하나 물어가며 배웠다. 1시간 정도 배웠는데 대략의 원리를 이해하였다. 그 외 나머지는 유튜브 강의를 보면서 보강하면 될 것이었다.


멀리서 배우러 온 것은 나지만 나를 위해 시간과 장소를 배려해 준 건 그였다. 그에게 늦은 점심 식사를 대접했다. 교육에 집중하느라 미처 물어보지 못한 요즘 근황을 들었다. 그는 자신을 지도해 준 교수와 갈등이 있어서 박사과정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다행히 잘 아는 교수님을 통해 추천을 받아 다른 대학의 저명한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간 여기서 이수한 수업들은 학점인정이 되지 않아 박사수업을 다시 처음부터 들어야 하지만 자신을 이해해 주고 사람대접을 해주는 지도교수를 만나서 행복하다고 했다.


박사과정은 지도교수를 잘 만나는 것이 학위 취득의 99%를 좌우한다는 말이 딱 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의 새로운 박사로의 여정을 응원해 주고 그는 논문 분석만 남은 박사 마지막 학기의 나를 응원해 주며 훈훈하게 헤어졌다.


저녁 장사를 준비하는 부산한 거리를 지나 주차장으로 이동하였다. 주차시간에 비례하여 요금이 올라가기에 걸음을 서둘렀다. 걷고 있는데 구두 신은 발에서 시원함이 느껴졌다.


2005년도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15년이 넘는 동안 구두는 업무 할 때 언제나 나와 함께 하던 신발이었다. 그러다 보니 구두 때문에 무좀이라는 질병을 얻기도 하였다. 군화까지는 아니지만 바람이 통하지 않으니 오래 걸으면 땀이 차는 것이 구두였다. 그런 구두가 시원하다니 …… 잠시 걸음을 멈추고 유독 시원한 오른쪽 구두를 살펴보았다.


발을 들어 올리니 구두의 밑창이 고개를 떨구었다. 구두의 윗면을 들어 올리니 양말이 보였다. 구두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니 신발이 이렇게 될 때까지 왜 나는 몰랐지?'

모를 땐 걱정이 아닌데 아니까 걱정이었다. 당장 주차장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누가 볼까 봐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레 떼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입을 벌리는 오른쪽 구두를 보면서 '앞으로는 예비구두를 차에 넣어 다녀야겠다.', '당장 집에 가자마자 구두를 주문한다.'와 같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생각을 하였다.


최대한 바닥에 밀착한 걸음으로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주차요원이 반갑게 오더니 주차요금을 불러주었다. 분명 경차할인이 반영되지 않은 요금이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지갑을 꺼내 불러준 금액만큼 현금을 꺼내 주고 차에 탔다. 구두를 벗어던지고 양말만을 신은채 운전을 했다. 집에 와서 구두를 쓰레기봉투에 넣고 온라인 쇼핑몰에서 가죽 구두를 바로 주문 넣었다.


2년 전 그날 산 구두는 아직 신발장에 잘 모셔 있다. 어쩌다 한번 결혼식 같은 행사에 신는다. 구두가 떨어진 날 이후로 나는 구두 대신 가벼운 끈 없는 운동화를 주로 신게 되었다. 훨씬 가볍고 공기가 잘 통한다.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타의에 의해 격식 차릴 일이 거의 없는 시기가 오기도 했고 진한 색의 운동화는 양복에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를 괴롭히던 무좀도 통풍이 되어서 그런지 다 나았다.


시내 한복판에서 구두가 떨어지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구두가 벌어진 날은 양복에는 구두라는 나의 고정관념이 사라지는 계기가 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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