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 미팅이 가족 여행이 되다

2025 12월 해운대 여행 1일 차

by CJbenitora

번개 약속이 잡혔다. 거제에 사는 친구가 식사나 한 끼 하자고 하여 양쪽의 중간인 부산으로 잡았다. 날짜는 한가한 12월 일요일로 정했다. 얼굴 보고 얘기하는 거니 점심식사를 같이 하는 것으로 하고 부산 사는 다른 동생 둘에게도 오라고 얘기해 뒀다.


약속을 정했다는 사실을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그럼 하루 일찍 부산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당일날 가면 되는데 왜 전날 가야 하나요?"

"우리 가족 여행으로 갈꺼니까요!"

갑자기 개인 약속이 가족 여행이 되어버렸다.


실행력 빠른 아내는 해운대에 숙소를 잡았다. 토요일에는 해운대 산책을 하고 일요일에는 느지막이 일어나 나는 약속을 가고 아내는 아이들과 키즈카페로 가기로 했다. 내가 약속 끝나는 시간에 태우러 와서 집으로 복귀하는 스케줄이었다.


토요일이 되었다. 오전에 첫째 줄넘기 학원에서 선수단 교육이 있었다. 줄넘기학원의 행사는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첫째를 3시간짜리 선수단 교육에 보냈다. 마치고 와서 출발하려고 하니 오후 2시부터 3시 40분까지의 농구 클래스가 발목을 잡았다. 농구하는 날만 기다리는 녀석이라 빼먹고 가기가 어정쩡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부산에서 달리려던 계획을 바꾸어 아이가 농구하는 시간에 오늘 계획한 14km 조깅을 뛰기로 했다. 아내는 둘째와 2주 전에 빌린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고 오기로 했다.


조깅 거리가 2km쯤 남았을 때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30분쯤 걸릴 것 같다는 것이었다.

"언제 출발해서 갔는데 30분이나 남았나요?"

"일전에 첫째가 간절곶 해빵을 먹고 싶다고 했던 거 기억나죠?"

"네, 그런데요?"

"시간이 남아서 해빵을 사러 갔다가 왔지요."

"아니, 간절곶이 어디라고 거길 갔다 와요? 서생까지 편도만 40분은 걸릴 텐데..."

아이가 먹고 싶다는 것은 아무리 멀어도 다녀오는 극성 엄마가 따로 없었다. 체념한 나는 농구 끝나고 나오면 아이와 같이 있겠다고 얘기하고 통화를 끝냈다.


조깅을 끝내고 몸을 풀었다. 몸에 열이 식자 화장실에서 세안을 하였다. 정수기에서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나니 아이가 농구를 마치고 나왔다.

"엄마가 조금 늦는다고 하니까 친구랑 좀 놀고 있어."

아이는 같이 농구하고 나온 친구하나와 땅을 파면서 즐겁게 놀았다. 나도 스트레칭을 하며 잠시 쉬고 있으니 아내의 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뒷자리에서 달콤하게 자다가 막 잠에서 깬 둘째를 화장실에 데려가 소변을 누이고 놀이에 한참인 첫째를 차에 태웠다.

"이제 부산으로 출발하면 되지요?"

"아는 분이 부산에 간다고 하니까 허심청 이용권을 준다고 하는데 받아서 가요."

"어디서 준다던가요?"

"우리 동네 OOO에서요."

"지금 4시 반이 다 되어가는데 다시 우리 동네 갔다가 부산을 간다고요? 허허"

아이 스케줄에, 엄마 욕심에, 예상치 못한 변수까지 닥치니 헛웃음만 나왔다.

그래도 어떡하겠는가. 갔다가 가야지.


다시 동네로 올라가 목욕탕 이용권 2장을 받아 본격적으로 부산으로 출발하였다. 슬슬 어두워져 가는 동해안 고속도로로 신나게 달리다가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니 정체가 시작되었다. 해운대 가는 길이 어두운 아내를 대신해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다가 나도 처음 가보는 길에 헷갈렸다. 실컷 최단거리로 잘 와놓고는 길을 잘못 들어 빙둘렀다. 막히는 센텀 시가지를 뚫고 해운대 남쪽에서 중앙 쪽으로 올라가니 곳곳의 신호에, 밀리는 차량에 거북이가 따로 없었다.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경차라 건물 지하 주차장에 어렵지 않게 댈 수 있었다. 프런트데스크가 없이 문자로 안내받아 체크인하는 것이라 짐을 들고 해당층에 올라가서 비밀번호를 누르니 문이 열렸다. 내부가 좁아 보여서 실망했는데 막상 안에 들어가니 킹사이즈 침대가 2개가 있어서 안심하였다. 짐을 풀어두고 잠시 휴식하였다.


7시가 넘은 시간이라 출출했다.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쌀쌀한 날씨에도 주말저녁 해운대 시장 앞은 사람들로 장사진이었다. 절반은 관광 온 외국인들인데 씨앗호떡, 벌꿀 아이스크림, 분식점 등 노점에 줄을 서서 사 먹고 있었다. 최근 들어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생소했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이런 모습이 그렇게 생소하진 않았는데 시장이 휑해지고 젊은 세대 인구가 절반에 다시 절반으로 줄어들고 있다 보니 주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개미새끼 하나 없다는 다른 시장들과 비교되는 해운대는 역시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 이름값을 했다.


24시간 운영하는 유명 해장국집에서 수육을 시켜 고기 잘 먹는 아이들 먹이고 각각 갈비탕과 해장국을 한 그릇씩 했다. 배가 차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식당에서도 파닥파닥거리며 옆 테이블까지 기웃거리는 둘째를 둘러업다시피 하여 나와서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아 가로수 곳곳에는 조명들이 둘려져 있고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신호에 따라 도로를 건너고 있었다. 생각보다 날씨가 춥지 않다는 생각에 온도를 검색해 보니 섭씨 15도였다.


해수욕장에서는 빛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대형 공 모양의 조형물에 빛을 비춰 지구본으로 만들어 놓은 것부터, 각종 구체들마다 자기만의 색깔로 해변을 수놓고 있었다. 해안가에서 떨어진 바다 위에서는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는데 유람선에서 쏘아 올린 것 같았다. 불꽃을 다 쏘아 올린 유람선은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해수욕장 한쪽 끝 정박장으로 미끄러져 왔다. 평상시 볼 수 없는 장면들이었다.


아내와 내가 이런 생경한 모습에 심취되어 있을 때 아이들은 다른 것에 심취되어 있었다. 바로 모래였다. 첫째는 외투를 엄마에게 맡긴 채 모래를 쌓아 올려 성처럼 만든다고 정신없었다. 내가 붙어서 따라다니는 둘째는 파도 구경을 했다가, 빛구경을 다니다가, 모래밭에 드러누워 거북이 흉내도 냈다. 옷에 묻은 모래를 털어놓으면 또 뒹구니 자연스레 그냥 놔두게 되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산책 나온 강아지를 따라가며 인사를 하였다. 개주인이 떠나면 아이는 또 모래사장에 내려와 기어 다녔다.


그러다가 족제비를 데리고 산책 나온 젊은 여성 쪽으로 뛰어갔다.

"이게 뭐예요?"

"족제비란다."

"고양이예요?"

"아니 족제비야."

"고양이 족제비예요?"

그녀는 아이의 동문서답에도 친절히 다시 가르쳐주며 족제비도 만지게 해 주었다.

아이가 족제비를 신기해하자 옆에서 다른 아이들이 보고 모여들었다. 결국 그녀는 사람이 더 몰려들기 전에 족제비를 가방에 넣고 총총 사라졌다.


"아빠, 아까 그건 뭐예요?"

"족제비야."

"수달을 닮은 족제비예요?"

"맞아, 족제비는 수달을 닮았지."

처음 실물로 보는 족제비에 꽂힌 둘째는 그 뒤로도 계속 족제비에 대해 물었다.


1시간도 넘게 모래사장을 굴러다니다 시피한 녀석을 데리고 첫째와 아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첫째의 모래성은 둘째 키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둘째는 그것을 보더니 달려가서 모래성에 주저앉았다. 첫째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덤덤했다.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고 약속하고 둘을 끌고 해변을 나왔다. 일찍 와서 못 논 한풀이를 하듯 아이들은 모래놀이를 실컷 했고 우리 부부는 각자 아이 하나씩 잡고 신발이고 옷이고 잔뜩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다시 아까 지나친 해운대 시장 입구로 오니 시간은 9시가 넘어가는데 북적북적한 모습은 그대로였다. 줄을 서서 아이스크림을 샀는데 M&M's 초콜릿 몇 개 올린 조그만 아이스크림이 4천 원, 벌집 올린 아이스크림이 5천 원이었다. 과연 이런 가게가 울산 시내에 있다고 하더라도 줄 서서 사 먹을 정도로 잘 팔릴 것인가. 전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아내는 시장 저 끝까지 뭐가 있는지 보고 오겠다고 하였고 나는 아이들과 아이스크림 가게 건너편 문 닫은 점포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첫째는 오른쪽, 둘째는 왼쪽 바닥 벽돌에 앉아서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리 털었다고 하지만 모래를 뒤집어쓰고, 아이스크림을 입 주변에 묻혀가며 먹는 모습은 웃음이 절로 났다. 야인시대나 왕초 같은 드라마에서 보던 그런 아이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끔흘끔 보면서 웃으며 지나가고 나이 드신 분들은 "맛있나?" 하며 귀엽다는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물어보기도 하였다. 특히 둘째는 노는 동안 화장실을 안 가서 오줌을 지렸는데 팬티 부분이 젖어있어서 더 없어 보였다.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가자 아내가 나타났다. 안쪽에 맛난 떡볶이도 있고 반대쪽 끝도 여기처럼 호떡과 아이스크림을 팔더라면서 보고 온 소감을 말하는 아내는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 보였다. 그런 아내에게 아이들 꼴을 보여주고 둘째가 오줌지린 바지 앞섶을 가리키니 두말 않고 숙소로 갈 수 있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아이들을 씻겼다. 머리카락 사이사이에서 모래가 얼마나 나오는지 몰랐다. 샤워 후 잠옷을 입혀서 TV에 유튜브 영상을 틀어주었다. 나도 씻으며 아이 오줌이 묻은 하의와 속옷을 빨았다. 꽉 짜서 물기를 빼고 의자와 탁자에 걸쳐 놓았다. 오늘 밤 습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면서 내일 아침에는 말라 있을 빨래들이었다.


'아이들과 노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당분간 우리 4명만 가는 가족여행은 없다.'

속으로 생각하면서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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