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지가 집에서 4시간 거리의 리조트로 정해지자 마음 한편으로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처가에서 저녁을 먹고 TV채널을 돌리는데 사이사이 홈쇼핑 채널마다 여행상품 판매가 한창이었다. 이 쪽 홈쇼핑에서는 북해도 여행상품을 인당 80만 원 대에 소개하고 있었고 저 쪽 홈쇼핑에서는 동남아 여행 상품을 인당 70만 원 대에 판매하고 있었다. 얼마 전 원달러 고환율로 인해 내년 2월에 가려고 했던 하와이 여행을 취소한 적이 있기에 홈쇼핑의 여행 상품에 눈이 갔다. 12월이 되어 1,200원 대 후반으로 내려온 환율은 다시 여행에 대한 불씨를 지피고 있었다.
장인장모님과 처남네 식구들과 홈쇼핑 여행상품을 놓고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처음엔 어디를 가도 좋다는 의지로 가득 차 해외를 우선으로 두었다. 일본, 베트남, 괌 등이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곧 현실에 무릎을 꿇었다. 돌이 지나지 않은 아기 2명에 3살 배기 아이까지 챙겨야 하는 현실은 제주도도 버겁게 느껴졌다. 7살 첫째가 3살 때 갔던 일본 여행에서 아이가 비행기에서 울어서 1시간이 넘도록 좁은 통로를 안고 걸어 다닌 기억이 오마주 되었다. 처남 역시 솔직하게 어린애들 데리고 비행기 타는 건 자신이 없다고 하였다. 결국 직접 차로 이동할 수 있는 국내 여행지로 좁혀졌고 마지막에는 평소 가보기 힘든 지역인 충남 부여의 모 리조트가 낙점되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여행인데 국내 여행이면 어떠랴'
집에서 4시간 동안 운전해야 하더라도 내가 일정을 조절할 수 있는 국내여행이 현실적으로도 맞았다.
여행 당일이 되어 차를 타고 출발하였다. 휴게소를 2군데 들러서 그런지 아이들은 차 안에서 투정 없이 잘 있었다. 3시간쯤 지나니 7살 첫째가 언제 차에서 내리냐고 묻기 시작했다. 1시간이 남았다고 얘기해주었는데 그 뒤로도 계속 언제 내리냐고 물어왔다. 그때는 안전 운전을 중요시하는 아내가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내비게이션의 예상 시간보다 10여분 늦어졌다.
"엄마, 언제 도착해?"
"이제 10분 뒤면 도착해"
"근데 아까도 10분 남았었잖아, 왜 자꾸 시간이 늘어나?"
"주완이가 요새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고 해서 엄마가 시간 보너스를 받았지!"
"몇 분?"
"10분 더 받았지."
"아~ 엄마, 왜 보너스를 받아~ 나 내리고 싶단 말이야!"
"그렇게 엄마 운전하는데 자꾸 큰소리내고 투정하면 엄마가 길 잘못 들어서 보너스 30분을 더 받을 수도 있어."
아이는 보너스 30분을 더 받는다는 말에 잠잠해졌지만 내릴 때까지 몸을 배배 꼬았다.
목적지인 부여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자기 전과 일어난 후에는 어김없이 리조트 방에서 술래잡기 놀이를 하며 뛰어다녔다. 심하게 뛰어다니다가 토하기도 하였다. 이튿날은 꼬맹이들과 한참을 유아풀장에서 물놀이를 하였다. 물놀이 후 아내는 아기를 씻겨 나오다가 출구에서 아기가 응아를 하는 통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뒷정리를 하고 다시 씻기기도 하였다. 그날 오후엔 첫째가 눈싸움을 하고 싶다고 해서 근처 아웃렛에서 아이들 장갑을 사 왔고 저녁식사 후에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리조트 앞 정원에서 한참을 눈싸움을 하며 놀아주었다.
여차저차 2박 3일이 흘렀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 첫째는 차에 타자마자 집에 언제 도착하냐고 물었다. 내비게이션에 뜬 도착시간은 오후 5시였다. 아이는 점심 식사 후라 배가 부르고 피곤했는지 출발한 지 몇 분 되지 않아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잤다. 그렇게 추풍령 고개를 넘었고 경상도로 들어서서야 정신을 차렸다. 잠이 깬 첫째는 자꾸 내비게이션 시간을 체크하였다. 둘째인 아기는 3시간을 조용히 카시트에 잘 앉아있더니 1시간을 남기곤 빽빽 울기 시작했다. 휴게소에 들러 잠을 깨고 먹을 것을 사고 아기에게 뭐라도 먹이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결국 집에는 오후 6시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보채던 첫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줄넘기를 들고 신나게 뛰어놀았다. 이유식을 줘도 차가워서 그런지 안 먹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배고픈 울음을 멈추지 않던 둘째는 집에서 전자레인지에 이유식을 따뜻하게 데워주니 한통을 뚝딱 먹고 기분이 좋아졌다. 짐을 정리한 후 애들을 씻기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3일간의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9시간을 푹 자고 일어났다.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다. 어린이집에 가기 위해 첫째와 둘째를 차에 태우는데 둘째가 카시트에 앉자마자 울었다. 첫째가 물었다.
"아빠, 효신이 왜 울어?"
"효신이 어제 여행 갔다 집에 오면서 너무 오랫동안 카시트에 앉아 있어서 운 거 기억나지?"
"어"
"오늘도 그렇게 오래 앉아 있는 거 아닐까 해서 우는 것 같은데?"
"효신이는 우리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지금 어린이집 가는 건지 멀리 가는 건지 모르지?"
"그래, 그리고 효신이는 아기니까 카시트에 오래 앉아 있는 거 못 참잖아."
"아빠, 나는 오랫동안 참을 수 있지?"
"주완이는 어제도 4시간 동안 잘 참았잖아!"
"맞아, 근데 나보다 엄마가 더 잘 참지?"
"그렇지, 어른들은 더 잘 참지!"
"엄마 보다 아빠가 더 잘 참고... 할머니가 아빠보다 더 잘 참잖아."
"하하, 맞아"
이번 부여 여행은 맛난 것을 먹고 물놀이를 하고 울산에서 보기 힘든 눈을 실컷 보았지만 어른들을 위한 여행은 아니었다. 아이의, 아이들에 의한, 아이들을 위한 여행이었다.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신나게 해 주기 위해 준비하고 놀아주는 건 힘든 일이었다. 아이들이 생각과 같이 움직여 주지 않을 때는 화가 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내자고 온 여행이 아니었다. 모든 상황을 여유롭게 받아들이면서 여행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은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이 되었고 처가 식구들과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여행을 할 때마다 배우는 것이 있는데 이번 여행은 7살 첫째가 무엇을 배웠는지 알려주었다.
어른의 자격은 참을성이라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