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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llie Jun 13. 2020

듣기의 힘

'듣기'란 무엇일까?

이른 아침 학원 셔터를 올릴 때면 항상 나이 60이 넘으신 할아버지 한 분이 가장 먼저 들어오셨습니다. 그 시간대 학원에는 저를 빼곤 아무도 없었는데 늘 가장 일찍 나와서 강의실에 자리를 잡고 공부를 하시곤 했지요. 그 사이사이에 본인의 이야기를 저에게 해주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구요. 사실 제법 긴 시간이 지난 지금 그때 들었던 이야기들은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때 이야기를 나눌 때 느낌은 긍정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지요. 저는 거부감 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손주뻘 되는 아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는 모습이랄까요. 어쩌면 대학생이라고는 하지만 학원 옥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아침 일찍 학원 문을 열고 학교를 다니는 손주뻘의 아이를 조금은 안타까워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할 때 야간의 특성상 새벽녘이면 술에 마음을 의지한 채 오시는 분들이 오시곤 했습니다. 매일 새로운 분들보다는 매번 오시는 분들이 오가셨죠. 그리고 하루는 동네 중국집 사장님이 술에 마음을 의지한 채 오셨습니다. 그리고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을 보고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지요. 그 새벽 바쁠 일도 없고 가만히 그 이야기들을 들어드리고 그렇게 다시 갈 길을 가셨습니다. 결과를 알 수는 없지만 조금이나마 그분의 마음이 풀어지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랄까요.


인담으로 일하면서 하루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데 외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일종의 민원전화인데 일반적인 경우라면 고객담당부서로 이관을 했겠으나 이미 돌고 돌아온 전화임을 알았기에 가만히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요지는 이랬습니다. 10년쯤 전에 작은 IT기기를 사서 잘 썼는데 고장이 났다. A/S를 받고 싶은데 전화를 해도 A/S가 안된다고 한다는 이야기였지요. 사실 이미 생산이 중단되어 부품 등도 구하기 어려운 상품에 대해 현실적으로 A/S를 받는 건 어려워 보였지만 수화기를 통해 하시는 이야기를 그냥 들었습니다. 50분 정도 시간이 지나고 그분은 전화를 끊었는데 마지막에 한 마디를 하셨어요. '고맙다'라고. 전화를 그렇게 했는데 아무도 자기 이야기를 안들어주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그분의 돌림전화는 마지막이 되었지요.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등장했을 때 제가 바라본 그들은 일종의 해방공간이었습니다. 사견임을 빌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나름의 의견들이 있음에도 그것을 표출할 수가 없는 환경 속에서 있었다고 할까요.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그렇게 의사표현을 주저하던 이들에게 좀 더 쉽고 적은 부담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는 생각입니다. 사견을 덧붙이자면 트위터는 어느 순간 리스너의 특성보다 스피커의 특성이 좀 더 많아지는 느낌이 있었고 페이스북은 여전히 리스너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지요. 공감하는 소수만으로도 충분한 일입니다. 


경험이 늘어나면서 자의에 의해 혹은 외적인 요인에 의해 이전보다 말하기의 비중이 늘어납니다. 스스로 늘 경계하는 부분입니다. 그냥 저는 저 스스로 말을 많이 하는 사람보다는 누군가 말할 상대가 필요할 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기 위해 대나무 숲을 찾아가는 대신 나에게 와서 그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물론 그 모든 이야기에 대해 제가 해결책을 제시하는 건 불가능하겠죠. HR이라는 일을 더하면 언제나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건 HR이라는 일을 망치는 길임을 알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듣기 자체가 가지는 힘을 믿습니다. 최근 몇 년간 경험한 놀라운 일들을 그렇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긍정적인 답이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음을 이야기드렸을 때 상대방이 나에게 보이는 모습들이었습니다. 괜찮다고. 해결해 달라고 말하는 건 아니라고. 그냥 알아만 달라고. 그렇게 대화의 끝에서 저는 오히려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리더는 과거의 리더보다도 더 많이 들어야 합니다. 설사 그 듣기가 이상하다 싶어도 혹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 하더라도 일단 들어야 합니다. 리더의 역할은 듣기를 짜르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거나 들었던 이야기를 부정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리더는 듣기를 통해 알게 된 상대방의 생각을 어우러 만질 수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현재 발생하는 거리감을 해소할 방법을 찾는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는 제가 인담의 역할로서 이야기하는 coaching과 facilitation의 개념으로 연결됩니다.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통해 배우고 생각하는 과정으로서 coaching과 그 과정을 통해 도출된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수렴될 수 있는 지점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facilitation입니다.(일전에도 이야기드린 적이 있으나 이 두 개념정의는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정의이므로 일반론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특히 facilitation의 경우 이 글에서의 facilitation은 일반적인 경우에서 말하는 '중립성'을 버리고 '가치지향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리더로서 듣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눈을 마주치고 수시로 고개를 끄덕이고 상대방이 사용한 단어를 인용하면 된다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 싶은 건 외형보다 중요한 건 진정성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눈을 맞추고 상대방의 단어를 인용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라도 진정성이 없으면 그건 듣는 게 아닙니다. 듣기를 흉내내는 것일 뿐이죠. 듣기를 할 땐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먼저 입니다. 만일 도저히 이해를 못한다면 why를 물어보실 수도 있겠죠. 듣기의 중심에는 '나'가 아닌 '상대방'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듣기가 선행된 후 리더의 생각이 가미되어야 비로소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듣기란 상대방이 본인의 이야기를 다 했으니 이젠 내 이야기를 할께! 가 아님을 리더로서 모든 우리들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오래 전에 읽었던 책 중 '잃어버린 지혜, 듣기 / 서정록 지음 / 샘터'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을 인용하며 글을 마칩니다. (책에서는 주어를 '아이들'로 표현하였으나 아래에서는 '사람들'로 바꾸어 표현하였습니다.)

만일 사람들에게 배출구가 없다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없으면, 사람들은 입을 꼭 다물고 있게 되고, 그들의 재능은 썩는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그래서 그들의 가슴을 열도록 격려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발산할 다른 방법을 배울 것이고, 이 에너지는 그들을 파괴할 것이다. 사람들은 말함으로써 자유로워진다. p13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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