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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llie Jan 09. 2022

HR, 페어슈탄트와 페어눈프트

페어슈탄트verstehen, 페어눈프트Vernunft

일을 좋아한다고 말을 합니다. 보다 정확히는 HR이라는 제가 하는 일을 좋아한다고 말을 합니다.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어떤 분은 opellie 당신이 그 일을 해왔으니까, 달리 말해 그걸 빼면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라고 말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냥 익숙한 경험에 기반해 안정적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16년을 꼬박 HR과 함께 했는데 그걸 갑자기 바꾼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인문계-사회대를 거쳐 경영학, 그 중에서도 HR이라는 분야를 해온 입장에서 갑자기 IT기술을 직업으로 활용한다는 건 제가 그리 뛰어난 사람이 아님을 알기에 조금은 어려울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럼에도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제가 하는 HR을 조금 더 잘해보기 위한 노력을 하고는 있습니다. Python이나 R 같은 도구들을 배워보기도 하고 MS Azure를 배워보기도 하고 말이죠. 그러고보니 따라가는데는 실패했지만 DB를 배웠던 경험도 있었네요. 


경험으로부터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 나누어보면 직접경험을 통해, 간접경험을 통해, 그리고 이들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추론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직접경험이나 간접경험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 있음 역시 경험을 통해 배웠습니다. 요즘이라면 다소 상식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는 일들도 그것이 그냥 내가 조금 더 희생해도 되는 것이라면 일단 경험을 해보고 판단을 했습니다. 경험을 해보면 조금 더 그 경험에 대해 이해를 높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 경험에 변화를 만들고자 할 때 이전의 경험을 나쁜 것이 아니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단순한 예로 군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유도 모른 채 맞았던 경험을 하면서 그 경험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고 이후 제가 선임이 되어서는 그러지 않았다거나 전 사수보다 선임이라고 근무를 제때 밀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선임이 되어서는 그런 모습을 만들지 않아야겠다고 배우는 그런 것들입니다.


간혹 스스로 HR을 잘 안다고 말하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면 드는 생각은 적어도 이 분들은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을 못하고 있거나 혹은 일부만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직접경험이 없거나 부족하고, 설사 직접경험이 있다 하더라도 그 외의 간접경험이나 추론을 통해 더 배우는 것을 잘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지금 읽고 있는 최동석 저자님의 '성취예측모형'이라는 책에 페어슈탄트verstehen, 페어눈프트vernunft 라는 단어로 이를 조금 더 살펴보려 합니다. 잠시 인용해보면,


페어슈탄트는 겉으로 보이는 단순한 이해와 지식을 뜻하는 이성작용을 말한다. 지성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애완견이 주인을 알아보고 꼬리를 흔들면서 반기는 수준의 이해와 지식, 역량진단과 인사실패의 중요성을 알고 이 책을 집어 들고 읽는 수준의 이해와 지식 등이 여기에 속한다. 
페어눈프트는 세상의 이치나 그들의 관계를 추상하고 추론하는 사유 능력을 말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면서 어떤 사건의 이면에 어떤 원인이 있었을지를 캐묻고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를 밝혀내는 능력이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 유독 인사실패가 반복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그 원인을 분석하고 종합해 판단하는 능력이 여기에 속한다. 칸트가 사용하는 이성은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힘으로서 페어눈프트를 지칭한다. - 최동석 / 성취예측모형 / 클라우드나인 / p200  - 201


HR은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페어눈프트가 중요한 영역이 되었습니다. 제가 HR을 만나서 시작하던 시점의 저에게 주어진 HR은 페어슈탄트에 가까웠지만 16년의 시간동안 HR분야에서 제가 느끼는 건 페어슈탄트 만으로 HR을 이해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HR이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주요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HR에서 페어슈탄트 역시 중요합니다. 페어슈탄트를 기반으로 페어눈프트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만 HR에서 페어눈프트를 이해하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에 대해 HR을 잘 안다고 말을 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페어눈프트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비로소 알게 되거든요. 우리가 배웠던 지식이나 경험들에 기반한 페어슈탄트가 매우 일부분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일전에 직급체계 등을 이야기하며 지식과 사고의 영역을 기준으로 일종의 레벨링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페어슈탄트와 페어눈프트의 개념으로 설명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전문성의 확보과정 by opellie

그래서일까요? 가끔 HR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HR을 잘 안다고 말하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HR을 페어눈프트로 이해하지 못하고 페어슈탄트로 바라봄으로써 누군가가 한 제도들을 그대로 모방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제도를 엄격하게 설계하여 구성원의 행동을 통제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트료시카 인형이 가지는 특성이란 그 인형의 외형이 아니라 인형 속에 또 다른 인형이 들어있음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외형상 인형이 전부인 것으로 말합니다. 어쩌면 오늘날 HR이 그 중요성에 비해 생각만큼 자신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스스로를 안정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조금은 역설적이지만 HR을 좋아하다보니 HR이 보다 더 나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하게 되고 실무에서 직접 그 모습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을 부리기도 합니다. 안정을 포기하고 변화 속으로 스스로를 이동시키는 이유입니다. 

몇 개월 전 옮긴 기업에서 나오기로 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한된 경험과 제한된 합리성에 기반한)페어슈탄트가 정답이 되어 페어눈프트를 잡아먹는 상황을 마주하기 어려웠다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또 하나의 경험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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