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llie의 대나무숲
외로움
이 문장을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감정은 '외롭다'였습니다. 다른 기능부서들이 볼 땐 권력을 가진 부서처럼 보이기도 하고, 대규모 채용을 진행할 때 정장을 입고 이리저리 질서 정연하게 안내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기도 하구요. 평가 데이터를 다루고 보상을 결정하고 사용자 관점에서 구성원과 협상을 하기도 하고 때론 경영자와 밀접하게 일을 하는 모습도 무언가 인정받고 있어 보이게 하는 모습들일 수 있겠지요. 이렇게 보면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인사 담당자로 산다는 것은 제법 멋진 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외형 안을 채우는 일을 이해해주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몇 년 전 실무자 컨퍼런스의 참석자분들의 후기에서 '배우러 왔다가 힐링하고 간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건 그래도 인사를 하는 공통분모를 간직한 사람들이 모였기에 그 시간이 조금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도 이러한 외형은 제가 인사라는 일을 할 수 있게 도와준 면이 있습니다. 사실상 아무것도 모르고 딱히 무언가 할 수도 없는 중소기업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명함에 찍힌 인사팀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일단 인사라는 공통의 무리에 들어갈 수 있었고 덕분에 많이 배울 수 있는 시간들을 마주할 수 있었으니까요.
대학시절 저와는 달리 아주 덩치가 좋은 친구와 같이 자취를 했었습니다. 둘 다 지방에서 올라왔기에 서울구경을 하자며 무작정 서울로 와서는 둘이서 밤새 서울 거리를 돌아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종로 1가에서 5가까지는 계속 걸어 다녔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나중에 들은 학교 선배들은 저에게 한결같이 '너는 친구 덕분에 무사한 거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체구가 작은 편이기에 덩치 좋은 친구 아니었다면 이상한 사람들이 꼬였을지 모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어쩌면 인사라는 타이틀은 서울의 밤거리를 배회하면서도 저를 안전하게 만들어주었던 그 친구와 같은 역할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BSC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고 민망해하면서도 인사담당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나 자신을 들이밀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저에게 결정을 하도록 했습니다. 인사담당자라는 타이틀을 들이대며 최대한 그 타이틀을 활용할 것인지, 아니면 그 타이틀이 없어도 인사라는 일을 그래도 좀 알고 할 줄 아는 아이로 만들 것인지에 대한 결정입니다. 그리고 제가 선택한 건 후자였습니다. 나 자신을 타이틀로 포장해 얼음처럼 단단하게 둘러싸서 제 자신을 지키기보다는 얼음이 아닌 물이 되어 속이 다 드러내어, 그래서 누구나 물을 이용할 수 있게 하기로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짐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 안에 물을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퇴근 후 노동법 학원을 다녔고, 점심시간에도 학원 강의를 들었습니다. 퇴근 후 인사 모임이 있으면 최대한 참석하려 했고요. 뭐 가끔 그렇게 모임에 나갔다가 '굳이 왜?(나왔어?)'라는 약간의 비아냥을 듣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갔습니다. 물론 돈이 없어 비싼 모임들은 나가질 못했지만 말이죠. 그 물을 채우는 시간을 2006년 인사담당자로 살기 시작하면서 2023년을 보내는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처음 빈 통에 물을 채우는 건 좀 더 노력이 필요하지만 어느 순간 조금 채웠다고 방심하면 물은 금세 썩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우고 생각하고 정리하고 덜어내는 과정을 계속합니다. 글쓰기, 대학원 석사/박사과정, 책을 읽고 간간히 논문을 찾아보는 것, OKR과 같은 개념들을 카드형식으로 정리해보는 것, 17년이 지나도 여전히 현장에 발을 담그고 사람들과 마주하는 것, 편할 수 있는 곳을 놔두고 스타트업에 무작정 뛰어들었던 것 등은 내 안의 물이 썩지 않고 늘 살아 있어서 누군가 그 물이 필요한 이들이 언제든 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고마움
물을 채우는 노력을 하면서 얻게 된 또 다른 소중함은 사람들입니다. 인사 모임에서, 대학원에서, 직장에서 만난 분들은 때로는 제가 물을 채우는 과정에서 잘못 들어간 것들을 걸러주기도 하고, 이게 맞는 건지 헤매고 있을 때 물이 흐려지지 않도록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새로운 분들을 알게 되기도 하고, 가끔 제 닉네임을 알아봐 주시는 분들을 뵙기도 합니다.(여전히 저에겐 신기한 일이긴 합니다)
Opellie에게 인사담당자로 산다는 것
저에게 인사담당자로서 17년이라는 시간은 나라는 존재에 인사라는 물을 채우고 누군가 인사라는 물이 필요한 분들이 있을 때 그 물을 활용하실 수 있도록 그 물을 신선하게 유지하는 것, 그래서 언제든 지금 시점에 적합하고 활용할 수 있는 인사라는 물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외로움과 고마움, 스스로에 대한 다짐과 판단이 녹아 있습니다.
2022년 12월 31일로 인사담당자로 살아온 지 정확히 17년이 지났습니다. 18년 차의 첫 개월을 보내며 현장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맑은 물도 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누군가는 그건 이상일뿐이라 생각했을 수 있는 인사를 이야기하려 하고 있으니까요.
17년이 지나도 여전히 현장에서 움직이고 있고 가능하다면 조금 더 오래 현장에 있고 싶습니다. 현장에서 다양한 구성원분들의 가까이에서 사람들이 제가 가지고 있는 인사라는 물을 가치 있게 활용할 수 있도록 제 자신을 채우고 비우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욕심이 있다면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그 물이 도움이 된 누군가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러면 그래도 조금은 멋있게 살아가는 인사담당자였노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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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생각이 많은 편이라는 말을 듣고 살았지만 인사담당자로 살아가면서 생각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도 인사담당자로 살아온 시간 덕분에 그 생각들이 조금씩 정리가 되고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겠지요. 인사가 만사라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정말 인사가 만사라 생각하는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많은 생각들이 오가는 2023년의 시작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