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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llie Oct 20. 2023

[의미 있는 시간] 책

살아가는 시간을 돌아보는 시간

의미 있는 시간을 기록합니다. 
의미는 주관적입니다. 주관적이라는 건 특정 개인의 생각에 불과할 수 있지만 여러 개의 주관적인 생각들이 모이면 우리는 그걸 다양성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누군가에게 다양성은 혼란스러운 상태이지만 누군가에게 다양성은 새로운 생각을 만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물론 주관적입니다. 

주관적인, 의미 있는 시간을 기록합니다.


몇몇 글에서 이야기를 했지만, 어릴 적 나는 책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책을 좋아하는 누나와 다르게 학창 시절의 나에게 책은 교과서와 공부에 필요한 책들이 다였다(그렇다고 엄청나게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었다) 서점을 하시는 아버지 친구 덕분에 책방을 종종 들르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학교 공부를 위한 책 이외에 책들은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중학교 때 유행했던 무협소설이나 만화책조차도 관심이 없었으니 다른 책들을 좋아할 리가 만무하다.


내가 책에 관심이 없었던  건 공부에 올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기 위해 보았던 책들만으로도 이미 책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소설, 무협지, 만화책 등 그 무엇이든 간에 일단 책이라는 것을 추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나에겐 없었다. 이미 보고 있는 책들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사회에 나와 인사라는 일을 시작하던 그 해 7월경부터 책을 보기 시작했다. 내돈내산은 당연히 아니었고 우연히 선물로 받은 책 두 권이 그 시작이었다. 학창 시절에 보았던 시험을 위한 책들과는 많이 달랐다. 똑같이 글자와 문장, 그리고 간단한 도식과 그림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학창 시절의 책은 나에게,


"당신 생각은 던져 버리고 내가 이야기하는 대로 하세요"

라고 말하고 있었던 반면  이 두 권은 나에게,


"내 생각은 이런데 당신 생각은 어때요?" 

라고 말하고 있었다. 

인사업무를 시작하고 불과 6개월 남짓을 보내던 시기의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일단 일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지식(Knowledge)이 없었고 어떻게라는 경험적 방법론(Skill)도 없었고, 당연하게도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할 수 있는 능력(Ability)도 없었다. 그런데 책은 나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고, 나는 책에게 아무것도 없지만 지금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생각들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책은 내 생각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책은 그 여백에 내가 하는 모든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내가 내 생각이 부족할 수 있음에도 그 생각을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이다. 


시간이 흘러 아들의 방에 부모님이 처음 오셨을 때 부모님이 하신 말은 그래서 기억을 한다. 


"아들, 방에 책이 많네?"


물론 나보다 더 많은 책을 보는 분들도 있지만 어릴 적 나를 보아오셨던 부모님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상전벽해라 할 수 있는 상황이니까. 


나에게 책은 매우 효율적으로 지식 혹은 누군가의 생각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고시원, 반지하, 옥탑을 살면서 비용이 많이 드는 무언가를 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책을 살  수는 있었으니까. 책을 보기 시작한 이유이다.


물론  책을 보면서 갖게 된 단점도 있다. 일종의 편식이다. 처음엔 경영과 같이 최근의 트렌드라고 말하는 책들을 주로 봤다. 외국 어느 대학의 교수님의 책이라거나 베스트셀러 등으로 소개되는 책들이다. 그러다 내가 읽는 책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다. 조금은 난해한 철학책이라거나(보다가 포기한 책도 몇 있다) 플라톤의 국가론과 같은 책들, 소설 중에서도 프란츠카프카의 변신이나 도스트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같은 오래된 고전소설 등이 그 대상이다. 단언컨대 난 이들을 온전히 이해하고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 그대로 글자만 보고 넘어간 페이지들도 있다. 이들은 내 부족함의 민낯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부족함을 반드시 채워야 하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그 부족함을  인식하는 것은 그 부족함을 다른 방식으로 채울 수 있음을 생각하는 힘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책을 꾸준히 읽다가도 갑자기 책을 멀리하기도 한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요를 나 자신에게 할 생각은 없다. 어릴 적 나는 책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 역시 책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보다 정확히는 책과 대화를 하는 시간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책을 통해 인사이트를 얻는 것이라기보다는 책과 대화를 통해 인사이트를 얻는다. 


MBTI가 「I」로 시작하는 나에 대해 대학시절의 나를 아는 선배들은 '말이 없는 아이'라고 말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말이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기 위해 책과 대화를 하고 있고 나 자신의 생각과 대화를 하고 있다. 보이는 대화는 하나이지만 그 대화의 내용은 그 이전의 수많은 대화가 만들어 낸 결과이다. 


책을 본다는 건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고 대화를 한다는 건 책과 내가 나눈 대화를 다른 이들에게 공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유된 나와 책과의 대화는 때로는 다른 대화들 속 이야기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의 대화와 뜻을 달리하기도 하지만 일단 존재하는 나와 책과의 대화로써 존재가치는 충분하다. 


의미 있는 시간으로서 책을 읽는 시간을 이야기한다. 


#Opellie#의미있는시간#Meaningful#독서#책#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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