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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llie Oct 18. 2023

[의미 있는 시간] 방청소

살아가는 시간을 돌아보는 시간

의미 있는 시간을 기록합니다. 
의미는 주관적입니다. 주관적이라는 건 특정 개인의 생각에 불과할 수 있지만 여러 개의 주관적인 생각들이 모이면 우리는 그걸 다양성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누군가에게 다양성은 혼란스러운 상태이지만 누군가에게 다양성은 새로운 생각을 만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물론 주관적입니다. 

주관적인, 의미 있는 시간을 기록합니다.

쉬는 시간 방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오래전, 그러니까 지금 집으로 오기 전에 전에 전의 집에서 샀던  조립식으로 된 작은 수납장부터 이젠 더 이상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누구에게 주거나 팔  수도 없는 잡다한 책들을 정리한다. 한 나절이 되어 버릴 물품들을 재활용과 일반을 분리하고 보니 제법 양이 많아졌다. 재활용은 내놓는 날짜가 있으니 한쪽으로 옮겨 모아 놓는다. 재활용과 종량제 쓰레기들을 모두 내보내고 나니 방이 한결 환해 보인다. 그 과정에서 어디에 있었을까 찾다가 포기했던  물건들이 나오기도 한다. 쌓여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 준다. 


방을 정리하며 내보낸 물건들은  지난날 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게으름의 결과물이다. 귀찮다고, 피곤하다고,  그냥 지금 좀 편하고 싶다고 등의 이유로 한켠에 미뤄두었던 삶의 무게들이다. 그 무게들을 덜어내었으니 한결 가뿐해진 마음을 갖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방을 정리하는 일은 물건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는 일이기도 하다. 공구함에 있어야 할 드라이버가 공구함으로 들어가 있도록 하는 일이고, 작은 무드등에게 책상의 한켠에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이기도 하고, 책에게 책장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 주는 일이기도 하다. 


"「순수와 위험」에서 더글러스는 더러움을 자리에 대한 관념과 연결시켰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발은 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지만 식탁 위에 두기에는 더럽다. 음식이 그 자체로 더러운 건 아니지만, 밥그릇을 침실에 두거나 음식을 옷에 흘리면 더럽다. -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p73" 


'더럽다'라는 표현이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달리 표현하면 그 대상이 본래 자신의 역할을 보다 잘할 수 있도록, 그래서 더 높은 수준의 편리함과 효율,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리하여 본래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평소 찾다가 포기했던 안경 드라이버를 만났을 때 내가 느낀 반가움도 그렇다. 

방을 정리했다는 것, 미뤄두었던 해야 할 일을 다했다는 것은 완전 무결한 엔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는 이제야 비로소  원점으로 돌아왔음을 이야기하는 것에 가깝다. 지금부터  우리는 깨끗한 방을 유지해야 하는 미션을 만나게 된다. 잠시만 느슨해지면 방은 다시 이전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아주 조심스럽고 자연스럽게 말이다.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 자취를 했었다.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출신의 남자아이 셋이 모인 방을 떠올렸을 때 깨끗한 방보다는 어지러운 방을 떠올리게 됨을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사는 방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깨끗함보다는 어지러운 방에 가까웠다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문제는 음식들이었는데 매월 친구의 부모님께서 택배로 바리바리 싸서 보내주신 음식들은 그냥 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매월 하루를 정해서 자취방에서 음식을 했다. 요리라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햄등 기본적인 맛을 가지고 있는 재료들에 조금만 열을 가해주고  옷을 입혀주면 그래도 남자아이들이라 먹는 건 잘 먹었던 기억이다. 


방 청소를 이야기하면 빼놓을 수 없는 단어로 '짱박는다'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적 의미로, '짱박다'는 '돈이나 물품 따위를 남이 찾기 어려운 곳에 숨기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내 머릿속에 이 단어가 자리 잡기 시작한 건 역시나 군대에서였다. 건빵이나 컵라면 등이 소중했던 군대시기 - 지금의 군대는 아닐 수 있지만-에 건빵, 컵라면 등은 무척이나 소중한 전투식량(?)이었지만 때로는 짱박아야 하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이 짱박기의 대상이 되고 싶기도 했었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문제는 간혹 짱박아 놓은 걸 잊기도 한다는 점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때로는 반갑지만 때로는 불편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가장 좋은 건 그때그때 바로 먹고 치우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짱박는 단어를 몰랐을 뿐 비슷한 행동은 어릴 때에도 있었던 듯하다. 지금 마트에 가서  흰 우유를 사면 잘 먹는데, 당시에는 흰 우유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팩트와 상관없이 내 기억 속에 초등학교 시절의 우유에는 기름기가 많았었다. 학교에서 받은 우유를 먹기 싫었던 나는 때로는 우유를 안 보이는 곳에 놓거나 가방에 넣어두곤 했는데 그러면 어김없이 이후에 상한 우유를 만나야 했었다. 그러고 보면 우유에게도 우유가 최상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시기와 장소가 있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더럽다'는 말은 죽일  수도 길들일 수도 없는 타자에 대한 미움과 두려움을 담고 있다. 그 말은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그러한 부정이 굳이 필요했음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주체성을 역설적으로 인정한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p80」하지만 그 '더럽다'는 단어가 제시된 상태를 만드는 건  어쩌면 우리들 자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지저분한 방은 지난 시간 내가 해왔던 게으름과 회피, 일부러 모른 척 하기의 산물이다. 


작은 운동기구가 자리를 찾았고, 필요할 때  바로 안경 드라이버를 꺼낼 수 있다. 드라이버가 필요할 때 바로 꺼내 쓸 수 있고, 글을 쓰며 떠오른 김현경 작가님의 책을 어렵지 않게 찾아 인용하며 글을 쓴다. 


의미 있는 시간으로서 방을 청소하는 시간을 이야기한다. 


#Opellie#의미있는시간#Meaningful#방을청소한다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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