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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듣기

by Opellie
어느 인사담당자의 경험은 그대로 두면 그냥 한 사람의 경험일 뿐이지만, 그 경험이 공유되면 다른 경험을 만들어가는 재료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합니다. 기존의 글들보다는 조금 더 주관적인 인사담당자 Opellie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기억의 조각에 크고 작은 살을 붙였기에 기본적으로 브런치북 '인사담당자 Opellie'는 실제 인물과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인사담당자의 시간을 기록합니다.


“따르릉~♬♪♬”


어딘가 반복되는 전화기 소리에 당겨서 전화를 받는다


“인사팀 OOO 입니다”


라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수화기를 들어 받은 전화에서는 어느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고객센터로 가야 할 전화가 우여곡절 끝에 인사팀으로 연결되는. 그럼 자연스럽게 고객센터 번호를 알려드리고 마무리하면 되는 상황이었고, 나는 고객센터로 전화해보시라며 번호를 알려드리고 있었다.


“근데, 안됀데자나”


그녀는 화를 내며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본인의 말을 하시기 시작했다.


“좀 들어봐”


로 시작된 그녀의 하소연은 10년도 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시점에서 시작했다. 십여 년 전 제품을 구입해서 잘 사용해오다가 고장이 났고, A/S를 받고 싶어서 여기저기 전화를 해봤는데 다들 안됀다고만 말한다는 이야기였다. 다들 안됀다고 말하니 속상하고 화도 나고 ‘사장님’을 만날 수 있으면 말하고 싶은데 방법도 없고 그렇게 전화번호를 찾고 찾아 걸으면 계속 고객센터 안내만 하고 고객센터는 또 같은 말만 반복하니 점점 화가 쌓여버린 듯 했다

아마도 고객센터 등에서는 수리보다 새로 사시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거나 부품 구하기가 어려워 수리가 가능할지 장담할 수 없다는 답변을 건넸으리라.


그런데 수화기 너머 그녀는 언제부터 사용해왔고 이 제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와 같은 요즘으로 보면 일종의 TMI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을 수화기 너머 얼굴도 모르는 나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이후 40분이 넘게 이어졌고, 나는 간단한 추임새와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통화를 마치는 나를 보며 옆 동료가 묻는다


“무슨 전화인데 그렇게 오래해?”


간단히 설명하자 그는


“그분 돌아가면서 계속 전화하시더니 거기까지 갔나보네”


라고 말한다. 알고 보니 이미 팀 내 다른 동료분들도 같은 전화를 여럿 받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고객센터에 전화해보셔야 한다고 안내를 했고 계속 반복되는 말에 그녀는 계속 전화를 했고 그렇게 돌고 돌아 나에게 온 상황이었다.


나와의 통화를 끝으로 그녀는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았다. 내가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지 수화기 너머의 그녀는 무한정 전화를 해댔지만 40여분의 나와의 통화를 끝으로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녀의 전화를 멈추게 한 건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답으로 '수화기 너머의 그녀의 이야기가 무엇이건 간에 일단 들어주었다는 점'을 이야기하려 한다. 생각해보면 내가 40여분간의 통화에 내내 집중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그녀가 하는 말들이 다소 논리적이지 않음을 판단하고 나서는 내 일을 하고 있었다. 다만 수화기를 내려 놓지 않고 귀에 대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인사 업무를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중 어떤 경우 그냥 들어도 논리가 맞지 않거나 과하게 주관적인 이야기들이 있지만, 나는 최대한 판단을 미루고 들어주려 노력한다. 어떤 경우는 그냥 들어주기만 하고 내 주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미팅이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도 있다.


인사를 오래하면서 자꾸만 상대방을 분석하고 답을 제시하고 판단을 하려고 하는 나를 만나곤 한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늘 조심스럽다. 내 경험은 과거이지만 인사에 있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인사담당자에게 중요한 도구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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