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오늘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
대학시절 제1전공을 하면서 항상 남는 아쉬움이 하나 있었습니다. 강의실에 들어가면 무언가를 배우고 있지만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는 생각 말이죠. 현실과 별개인 이론이 아니라 현실과 이어지는 이론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당시 1 전공 수업 중 어느 강의에서 들었던 이론이 당시 어느 신문에 나와있는 걸 봤을 때의 '반가움'입니다. 정말 반갑고 고마웠다고 해야 할까요. 어쩌면 그래서 저도 실무를 손에 놓지 않고 무언가를 계속하고자 노력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시집을 만난 건 군대에서 입니다. 그 이후 간혹 서점을 오가다 눈에 띄면 한 권씩 사 오곤 했습니다. 독서모임 개근을 기념으로 책을 고르다가 '잡문 / 안도현 / 이야기가 있는 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시집 같지만 엄밀히 말해 말 그대로 '잡문(雜文)'입니다. 저는 이를 '시인의 솔직함'이라 해석합니다. 안도현 시인의 시에는 '현실'이 있습니다. 특히 이 '잡문(雜文)'에는 많은 현실들이 오가고 있죠. 시와 현실을 바라보고 그 사이의 갭을 연결 지어 평소 우리가 현실을 현실로 바라보던 관점에서 현실을 시로 바라보게 해주는 그의 글은 강의실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사라지고 마는 이론이 아닌 현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이론이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여느 시집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많은 생각과 이야기를 하게 합니다. 몇 줄의 이야기를 건네고 큼지막한 여백을 눈 앞에 떡 하니 보여주는 식이죠. 때론 이해가 부족해서 때론 지식이 부족해서 때론 내 생각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해서 , 이런저런 이유로 모든 글에 대해 다 이야기를 하지는 못하지만 몇몇의 시인의 잡문에 대해서 독자의 잡문을 꼬리로 남겨봅니다.
나는 '나'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를 읽는 '너'에 의해서 결국 완성된다. p26
제가 책을 보고 낙서를 하고 시집을 보면서 꼬리말을 남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일방적 전달이 아닌 말 그대로의 소통을 위해서 책이건 사람이건 주고받음이라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정답을 썼으면 정답에서 과감하게 빠져나와야 열아홉 살이다. p156
답을 아는 것과 답에 매이는 것은 다릅니다. 답을 안다는 것은 답을 자신의 언어로 이해한다는 것이고 답에 매이는 것을 답을 단 하나의 답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맹신'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할 경우, 가장 아름다운 것을 연애라고 하고, 가장 더러운 것을 폭력이라고 한다. p159
누군가 나에게 이상형이 무엇인가 물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 내 삶에 개입하는 것이 개입으로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답을 합니다. 요즘 뉴스에서 들려오는 일련의 소식들은 그래서 참 마음이 아픕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할 경우 가장 아름다운 것을 연애라 하는 시인의 말에 공감합니다.
연두가 초록으로 넘어가기 전에, 연두의 눈에 푸르게 불이 들어오기 전에, 연두가 연두일 때, 연두가 연두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오늘은 연두하고 오래 눈을 맞추자. p220
연두가 연두였음을 초록이 되어서도 잊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도 인위적인 것일까?
어쩌면 지나친 바람일까?
그래도 왠지 자꾸만 연둣빛이 그리워진다.
가끔은 이렇게 시인의 말을 빌어 우리들이 우리 삶의 시인이 되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듯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