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장송의 프리렌]을 보고 든 생각을 끄적이다
인연은 물리적으로 유한하다. 그것의 길이와 끝을 맺는 방식이 다를 뿐, 꼭 끝이 찾아오기를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와의 새로운 만남은 미래에 그 사람과 이별을 맞이할 것이라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따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와의 인연을 쌓는 것을 지속한다. 이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우리의 사회적 본능이며, 현실과 인터넷에서 동료든, 친구든, 연인이든, 그저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관계든 수많은 인연들이 소멸되고 형성된다.
이렇듯 우리 인간은 짧디 짧은 인생이 흘러가는 동안 알다가 모르게 이별을 종종 겪는다. 그렇다면 천 년을 넘게 살아온 프리렌이 겪은 이별의 횟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하리라. 비록 원작 만화, 소설, 그리고 애니메이션에서는 프리렌이 살아오면서 맺고 끊어졌던 모든 인연들이 밝혀지지는 않지만, 확실한 점은 우리가 경험했던, 그리고 앞으로 경험할 이별의 수보다는 많을 것이다. 인생의 길이가 길수록 그만큼 이별을 수없이 겪어야 한다는 순리는 뛰어난 엘프 마법사인 프리렌조차 어찌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그래서 그런 것일까, 프리렌은 이별을 참으로 깔끔하게 다룬다.
작중에서 프리렌, 페른, 슈타르크, 그리고 자인은 튀어라는 도시와 오이서스트라는 도시 사이의 갈림목에 다다른다. 이때 프리렌, 페른, 그리고 슈타르크는 오이서스트로 가고자 하는 반면, 자인은 10년 전 모험을 떠난 자신의 오랜 친구인 고릴라를 찾기 위해 튀어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한다. 이별의 문턱 앞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동고동락해 왔던 관계였기에 아쉬움은 당연히 들 법하지만, 프리렌은 그러한 기색 없이 딱 말 한 마디만 자인에게 건네고 그를 쿨하게 떠나보낸다.
또 만나.
오이서스트로 향하는 길, 슈타르크는 프리렌에게 너무 깔끔하게 헤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이에 프리렌은 자인은 혼자서라도 분명 잘해 나갈 것이라는 대답을 한다. 이 장면에서 프리렌이 이별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엿볼 수가 있다. 프리렌도 자인과 헤어지는 것에 대해 속으로는 내심 안타까워했을 가능성이 높다. 프리렌은 평소 자신에게는 물론 페른과 슈타르크에게도 없는 자인의 성직자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사람을 융통성 있게 대할 줄 아는 자인의 성품도 높이 평가했다. 이런 귀중한 인재가 일행을 떠난다면 그 누가 달가워하겠는가. 그러나 프리렌은 이별의 순간에서도 자신의 여행에 초점을 둔다. 자인과 헤어지는 것은 아쉬울지언정 프리렌 자신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오이서스트라는 목적지다. 그 도시에 가야만 1급 마법사 자격증 시험을 제때에 응시할 수 있고, 그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면 대륙의 북부 지역을 통과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그리고 북부 지역을 갈 수 있다는 것은 결국 프리렌의 궁극적인 목적지, 죽은 자들을 만날 수 있는 아득한 북쪽 끝 오레올에 도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떠나려는 자인을 붙잡기 위해 설득하느라 시간을 쏟다가 오이서스트에 늦게 도착하게 된다면, 이 모든 계획이 연쇄적으로 무너질 것이 뻔하다. 그렇기 때문에 프리렌은 자인을 향한 미련을 가지는 것은 고로 여행길을 더디게 하는 짐을 늘리는 것임을 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생을 간혹 여행으로 비유할 때가 있다. 인생이 여행이라면, 그것을 살아가는 우리는 여행가라고 할 수 있겠다. 여행가에게는 저마다의 목적지가 있다. 그리고 그 목적지에 도달해야 여행의 가치가 생기는 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목표가 있다. 그리고 그 목표에 이르러야 우리가 살아 온 우여곡절의 인생이 가치 있을 터이다. 우리는 타인을 위해서 인생을 살지는 않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인생을 산다. 그러니 자신의 인생에 잠시 합류했다가 떠나려는 사람에게 쏠려 정작 목표로 이어지는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양이다. 이별이 슬프고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 사람이 없으면 외롭고 허전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바라보면,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오래 짊어지다가는 끝내 우리의 여행길에 짐이 될 뿐이다. 나 자신의 여행 속에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떠나는 상대방이 아니라 여행가 나 자신이다. 목적지에 발을 딛지도 못한 채 이별에 얽매여 여행을 멈춘다면, 그동안 어떻게든 지금 이 지점까지 걸어온 과거의 나 자신은 무엇이 되는가.
나도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면 깔끔하게 떠나보내고 자신의 여행을 마저 이어 나가는 연습을 해야겠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과 헤어져 본 프리렌처럼 이별을 대처하는 관록이 쌓이지 않는 이상, 그것은 단숨에 해낼 수 있을 만큼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인과 작별을 하는 시간 속에서 오이서스트를 잊지 않은 프리렌처럼, 나도 이별을 대할 때 나만의 오이서스트로 향하는 길을 놓치지 않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