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쓰는데 힘이 생긴다.
남편과 내가 감기에 걸렸었다. 초기에는 남편의 증세가 심해 내가 15개월 딸을 주로 돌보았다. 그랬더니 딸이 방심했던 내 감기에 옮아버렸고 열이 39도를 넘는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 보는 체온계 숫자와 처음 느껴보는 뜨거운 딸의 살갗에 어쩔 줄 몰랐고 해열제를 먹여도 잘 떨어지지 않는 수치에 이성을 잃고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그러는 사이 내 감기 증세까지 심해졌다. 목감기로 목소리를 잃을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두통과 코감기로 미각까지 잃을 정도였다. 그렇게 약 2주간 우리 가족은 감기와 함께 하느라 그간의 산책, 운동, 외식, 여행 등의 일상생활이 중단되었다.
그렇게 2주의 시간은 내 일상을 좀먹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아니. 2주보다 더 긴 시간인 듯하다. 감기에 걸리기 전 친정을 간 날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귀여운 손녀를 자주 보고 싶어 하는 부모님 때문에 친정을 일주일에 2~4번 간다. 이는 나에게 과식을 하는 경우가 그만큼 늘어남을 의미한다. 체중 증가를 동반하면서. 또 감기로 운동을 하지 못하고 독서와 글쓰기도 전보다 챙기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나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운동, 독서, 글쓰기와 같은 매일의 루틴들이 조금씩 희미해져 갔고 그렇게 꼿꼿했던 나는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기울어가고 있다는 것은 몸과 심리상태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몸은 너무 무거웠고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우울감과 무기력감, 쉴 새 없는 짜증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왜 이렇게밖에 살지 못하나. 매일 무언가 하려고 마음먹은 작고 쉬운 일들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 자꾸만 나를 땅 속으로 끌어내리려는 질문들만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급기야 남과 비교하여 점점 더 깊은 지하 세계에 이르렀고 남편은 이유 없이 당해주고 마는 선량한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딸의 보챔을 너그럽게 담아줄 마음의 넓이도 점점 좁아져만 갔다.
안 되겠다. 남편도 딸도 나보다 우선일 수 없다. 이러다 내가 기울다 못해 무너질 것 같다. 딸이 나를 찾으며 울든 말든 이 순간 모든 뒷 일은 남편에게 맡겨두고 나 먼저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말했다. 오빠 나 짐 가서 운동 좀 하고 올게요. 한 마디 던져두고 용수철처럼 누워있던 몸을 바로 일으켜 세워 편한 운동복 차림으로 갈아입고 운동화를 신은 후 집을 나섰다. 몸이 무겁고 무기력해 모든 행동이 느릿하고 미적대던 전과는 달리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누구보다 빠르게 행동으로 옮겼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불을 끄러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 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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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장기간 운동을 쉬었고, 증가한 체중이 관절에 끼칠 영향을 감안해 트레드밀 위에서 걷고 뛰는 것을 적절히 섞어 운동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30분만 하자며.
천천히 걷기를 2분간. 그것보다 조금 더 빠르게 1분간. 다시 천천히 걷기를 1분. 그러다 느리게 뛰기를 1분. 조금 빠르게 뛰기를 45초. 이런 식으로 트레드밀의 프로그램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중간중간 달리는 순간이 도래했을 때 힘들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웬걸. 몸이 왜 지금까지 운동을 하지 않았던 거야라고 물으며 나를 기억하고 반겨주는 듯했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데 힘들지 않았고 달리며 그 상태를 지속하는 느낌이 너무 상쾌했고 희열감이 극에 달했다. 오랜만에 흘리는 땀이 누구보다 반가웠다.
그렇게 30분의 운동 프로그램을 마치고 약간의 스트레칭 후 집으로 돌아왔다. 체중 증가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오랜만에 다시 한 운동이라 귀가하면 녹초가 되어 쓰러져 누워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나는 그와 정반대로 몸에 힘이 펄펄 흘러넘쳐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솟구친 아드레날린 덕분인지 기분도 좋아져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보고 웃는 딸을 번쩍 들어 안아버렸다. 남편에게는 아 너무 좋다. 걷고 달리고 왔는데 매일 해야겠어요. 운동 안 하고는 못 살겠다.라고 말하며 마음 한편에는 새로운 목표와 계획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임신 전에는 하루에 운동을 2시간씩 했었다. 그런데 출산 후 현실적으로 그렇게 장시간을 운동에 할애할 수 없다. 나에게 새로 생긴 역할이 있기 때문에. 이제 누군가의 아내이자 누군가의 엄마이므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누군가가 나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존재들이라 내게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고 싶기에. 변화된 나의 상황에 맞게 목표와 계획 또한 수정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매일 2~30분만 달리자. 내년에 복직을 하더라도 지금보다 운동시간이 더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더 늘어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라도 내가 운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운동에 투자하기로 했고 나에게 제일 접근성이 높은 러닝을 하기로 결정했다.
너무 실천하기 쉬운 목표와 계획. 더구나 커뮤니티 센터 내 짐이라 지리적으로도 가까워 더 실천하기 쉽다. 또한 달리는 그 순간에 느끼는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달릴 때 함께 보는 유튜브 영상이나 OTT 프로그램들은 나란히 같이 달리며 수다 떠는 친구처럼 달리기를 더 즐겁게 해 준다. 어느새 시작했던 러닝 프로그램이 끝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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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위 사진처럼 트레드밀 위를 달리고 왔다. 달리면서 쓰는 체력은 소모됨으로써 다시 생긴다. 운동을 하며 에너지를 쓰면 역설적으로 몸이 더 가볍고 힘이 더 솟아 활동반경이 전에 비해 더 넓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반면 움직이지 않고 비축하고 있는 체력은 점점 그 덩치가 커져 사람을 무겁게 하고 급기야 무기력하게 만든다. 정신은 우울하게 하면서.
나에게 특히 운동은 무엇보다 꼭 지키고 싶은 일상의 루틴이다. 운동을 하고 나면 나를 지켜주었다는 느낌이 든다.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또한 운동으로 내 일상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나의 경우 운동이 식욕을 떨어트리고 좀 더 건강한 식단을 더 쉽게 선택케 한다. 활력이 생긴 마음의 상태는 무엇이든 하고 싶게 만들고 실제로 더 높은 실천력을 보인다. 여러모로 운동은 내 삶의 동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매일 지켜나가고 싶은 나와의 약속이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내일 달릴 생각에 설렌다. 나 살자고 다시 시작한 달리기. 몸이든 정신이든 무너지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달려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