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덕후를 거쳐 영어 교사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여유로울 때면 서점이나 도서관에 자주 들립니다. 17개월 딸을 키우고 있다 보니 그전에는 쳐다도 보지 않았던 육아서 코너에 자주 가게 되는데요. 영유아기 때부터 ‘엄마표 영어'를 제목으로 혹은 주제로 한 책들이 공식적 통계자료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많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요즘 엄마들은 당연히 엄마표 영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 같아요.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엄마들은 내 아이만큼은 영어를 잘했으면 하는 생각에 조급해지기도 합니다. 나는 발음도 안 좋고 영어... 자신 없는데 어떡하지... 그래도 영어는 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수백만 원짜리 영어 전집, 나아가서는 영어 유치원에 기대기도 합니다.
그런데 엄마표 영어는 하면 무조건 좋기만 한 것일까요? 꼭 어릴 때부터 영어에 노출시켜야만 영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일까요?
저는 어릴 적 엄마표 영어도 없었고, 흔한 영유아기 그림책도 보지 않았고요. 5, 6살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어머니가 사주신 콩쥐팥쥐 같은 동화책들을 시작으로 흔히 말하는 책육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저는 중등 영어 임용 시험을 합격해 2014년부터 교직을 시작하여 9년의 경력을 쌓은 영어 교사입니다. (지금은 육아 휴직 중이지만요.)
제 부모님은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함께 자영업을 하셨습니다. 두 분 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자라 어릴 적 드시고 싶은 거 맘 편히 못 드시고, 특히 어머니는 학교를 더 다니고 싶으셨지만 못 가셨데요. 아들을 제일 생각하시는 외할아버지에 딸들 중에도 막내딸로 태어나셔서요. 그런 두 분은 자영업으로 큰돈을 벌어 자식새끼만큼은 맛있는 거 배불리 먹이고 사고 싶어 하는 거 다 사주고 학원도 공부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마음껏 보내고 싶으셨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부모님이 돈 벌기 바빠 갓난아기인 저를 유치원에 가기 전까지 어린이집을 거쳐 이모집에 맡기셨데요. 출근 전 어린이집 또는 가까운 이모집에 들러 저를 맡기고 퇴근 후 저를 다시 데려가는 방식으로요. 그렇다 보니 요즘 많은 엄마들이 하는 책육아나 엄마표영어, 몬테소리, 발도르프 등은 아얘 없었어요. 그저 이모, 이모부, 외사촌 언니, 오빠와 같이 먹고 놀고 자는 것뿐이었죠.
이런 제가 기억하는 영어와의 첫 만남은 유치원 때 잠깐씩 했던 단어 수업이에요. 빨간 사과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요. 옆에 'apple'을 썼던 기억, 애플이라고 입 밖으로 발음했던 기억도 나요. 쓰기까지 했으니 유치원을 다니던 마지막 해가 아닐까 싶어요. 초등학교 입학 전 7살 때요. 그리고는 영어와는 동떨어져 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영어 수업을 시작했어요. 초등 4학년 말부터 영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답니다. 문법을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원어민 강사와 회화를 배우는 곳이었어요. 놀랍게도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제가 그 학원을 보내달라고 했데요.
요약하자면 빨리 시기를 잡는다 해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본격적으로 영어에 노출되고 반복 학습을 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즉, 엄마표 영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고 영어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시기도 요즘 아이들보다 많이 느렸죠. 이후에 성인이 된 후 잠깐씩 갔던 해외여행을 제외하고 영어 습득을 위한 해외 유학도 없었어요.
그런 저도 원어민에 준할 만큼의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격할 수 있는 소위 임용고시라 불리는 시험에 합격해 영어 교사를 하고 있답니다. 평균 경쟁률이 15~20:1 내외에 전공이 전공인지라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분들이 다수 계시니 시험에 운도 많이 따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실력은 충분히 되어야 합격할 수 있겠죠.
중등 임용 시험에 대해 간략히 알려드리면 좋을 것 같아요. 1, 2차로 진행되고 1차 합격생을 대상으로 2차가 진행됩니다. 문제 유형은 객관식이 아닌 논술형, 단답형, 서술형으로 이루어져 있고요. 먼저, 1차는 1교시 전공과목 상관없이 공통과목인 교육학 시험을 치르고 2, 3교시 자신의 전공과목 시험이 뒤따릅니다. 그러니까 저는 1교시 교육학, 2, 3교시 영어(영어교육학, 영어학, 영미문학, 일반영어) 시험을 쳤던 것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공이 외국어 과목이라면 해당 외국어로 출제되며 답안도 해당 외국어로 작성해야 합니다. 즉, 영어로 읽고 써야 하죠.
1차 시험을 합격하면 약 한 달 뒤 2차 시험이 치러지는데요. 2차는 아래 보시다시피 수업실연과 면접으로 이뤄집니다. 저는 영어 과목 임용 수험생이니 영어로 수업 실연, 면접에 임해야 하죠.
결국 영어로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을 유창하고 정확하게 할 수 있어야 합격선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엄마표 영어 없이도, 또래 아이들보다 영어를 늦게 시작해도 영어를 잘할 수 있다는 거예요. 혹시 엄마표 영어에 의무감이나 조급함으로 불안에 떨고 계시다면 힘을 조금 풀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다른 사례를 말씀드려 볼게요. 같이 근무하던 부장선생님과 엄마표 영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 적이 있어요. 부장님은 자녀에게 어릴 때부터 영어 노래가 흘러나오는 CD를 들려주고 영상도 책도 많이 노출을 하셨데요. 그런데 그 아이가 엄마가 CD를 틀면 플레이어 앞까지 가서 톡 하고 정지버튼을 누른데요. 틀 때 마다요. 그 아이는 영어를 극도로 싫어해서 커서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도 영어가 내 발목을 잡는다는 말을 했다더라고요.
'그럼 엄마표 영어를 하지 말라는 소리인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혹시 오해하실까 봐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혹시 지금 엄마표 영어를 진행하고 있는데 아이가 즐거워하며 잘 따라온다면 계속 놀이처럼 지속하시면 되고요. 진행하고 계시는데 아이가 우리말도 느려서 영어가 힘들어 보인다면? 지금 엄마표 영어를 안 하면 뒤처지지 않을까 하며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영어책 읽기 량을 조정하거나 잠시 쉬셔도 좋습니다. 혹은 쿨하게 나는 엄마표 영어 안 하고 싶다 하시는 분은? 네. 안 하셔도 돼요. 지금 그 아이에게 더 의미 있는 활동으로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 수 있습니다. 엄마표 영어 없이도 영어 잘할 수 있어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건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는 엄마표 영어의 존재 여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그건 바로,
아이가 영어에 흥미를 느끼게 하고 그 흥미를 유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너무 일반론적이고 당연한 얘기를 거창하게 꺼냈나요? 저는 이 글을 시작으로 제 영어 습득 및 학습 과정, 주위 사례, 제 학생들을 가르치며 직접 느낀 것들에 대해 최대한 솔직하게 쓰고 공유할 거예요. 그 모든 글들의 공통점은 영어에 대한 흥미가 필요하다는 것과 아이가 영어에 흥미를 갖고 그 흥미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한 것입니다.
엄마표 영어를 하든 안 하든, 영어에 일찍 노출되었든 늦게 시작하든 중요한 건 우리말과 너무도 다른 영어를 습득하기 위해 꾸준히 몰두하며 영어를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이에요. 영어에 대한 흥미, 나아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등 영어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은 확실히 이 반복과정을 훨씬 용이하게 해 줍니다.
영어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거나 '영어가 싫다'는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면
아무리 엄마라도, 일찍 시작해도 영어 습득 효과는 크게 발휘되지 않을 거예요.
'영어가 재미있다, 할 만하다'처럼 흥미, 가능성과 같은 영어에 대한 호감이 있다면 그 효과는 엄청나게 크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엄마표 영어도 없었고 초등 3학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영어를 시작했는데 어떻게 영어에 단순히 흥미를 가지는 것을 넘어 덕후씩이나 되어 영어 교사까지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시죠? 다음 글부터 조금씩 찬찬히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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