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뽕에 단단히 취해 버렸습니다
아이들에게 영어에 대한 자신감, 흥미, 학습동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귀엽고 아기자기한 캐릭터가 나오는 영어 영상물이요? 재미있는 스토리의 그림책이요? 물론 영어에 관심을 갖게 되는 간접적인 영향은 아이에게 줄 수 있을 겁니다. 낯선 언어인 영어를 받아들이는데 매력적인 캐릭터나 아주 흥미로우면서 이해하기 쉬운 스토리는 그 역할을 톡톡이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방법은 따로 있어요. 그게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차근차근 적어보겠습니다.
저는 초등 4학년 말부터 영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학원은 문법, 독해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영어 회화를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곳이었어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답니다. 엄마 손을 잡고 학원에 가본 첫날, 학원 관계자분을 통해 영어 습득, 학원의 영어 수업 커리큘럼 관련 정보를 들었던 것, 한 가지 상황이나 주제에 걸맞은 주요 표현과 간략한 대화를 담고 있던 얇고 빨간 책, 원어민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대화를 듣고 따라 말하고, 원어민 선생님의 질문에 답을 하며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했던 순간들, 옆에 앉아있던 친구와 대화를 연습하던 것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임팩트가 컸던 기억은 제 회화 수업을 진행하실 원어민 선생님이 처음 등장하실 때에요. 마치 카우보이처럼 묶지 않은 긴 머리에 페도라를 쓰고 상의로는 널널한 셔츠에 조끼를 입고 하의로 약간은 타이트하고 허름한 청바지에 부츠를 신은, 체격 큰 젊지 않은 남자 강사 분이었어요. 아 덥수룩한 수염도 기억나요. 연세가 좀 있으셨던지 하얀 수염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때까지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었어요. 한국인, 한국인처럼 생긴 동양인들만 봐왔겠죠? 남자인데 머리를 길게 풀어헤친 사람도 처음 보았고요. 그렇게 체격이 크신 분도 처음, 수염도 그렇게 긴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그런 선생님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동시에 새로운 유형의 사람을 본 듯한 신기함, 게다가 긴장감이 살짝 저를 감돌고 있었어요. '어떡하지. 이거 가능할까?'
지금 생각하면 그 원어민 강사가 초등 4학년 학생들이 이해가능한 쉬운 영어로 또박또박 그리고 아주 천천히 발화했다는 추론을 당연하게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어른이 된 시점에서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저는 처음 보는 외국인이 우리말이 아닌 영어로 말을 시작했는데 '어? 내가 알아듣고 있네?' 하는 느낌이 시작되면서 제 마음속에 자신감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 원어민 선생님과 수업 중 1:1로 대화를 했던 기억도 나요. 그 선생님이 저에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니?라고 영어로 물으셨고 저는 'rice'라고 답했었습니다. 제 대답을 듣곤 선생님이 웃으셨어요. 아마 너무 싱거운 답변이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당시에는 선생님의 웃음에 그저 쑥스러워했었답니다.
원어민 선생님과의 계속된 회화 수업을 통해 아래와 같은 생각들이 계속해서 저를 자신감 넘치게 했습니다.
- 외국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
- 외국인이 하는 질문에 영어로 답할 수 있다.
- 외국인이 나의 영어 발화를 알아듣는다.
‘고로, 나는 어리지 않다. 외국인과도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난 참 멋있는 사람이야. 영어 할 만한 하네'로 그 자신감이 점점 차올라 영어뽕에 취해버렸습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제가 스스로 멋지게 느껴졌고 마음에 들었습니다. 끊임없이 영어를 하고 싶어 졌습니다. 지금보다 더 잘하고 싶어 졌습니다.
그 선생님과의 첫 수업 이후로 항상 기대를 안고 학원에 갔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자주 말씀하세요. 초등학생이 도보 10분 거리의 학원 차 정차지까지 혼자 걸어가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그 학원을 가더라는 말씀을요. "어린 게 거기까지 그렇게 걸어가서 학원차 타고 가는 게 신기하더라."
특히 외국어를 습득하는 데 있어 '자신감'은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외국어 습득 과정에 많은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죠.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의 소통과정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 취업 후까지 다양한 영어 시험에서 많은 오류와 실수들이 발생할 텐데 그럴 때마다 자신을 의심할 것입니다. '나는 영어를 못해,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역시 난 영어는 안 되는 사람인가 봐'처럼요.
영어 교육 이론의 측면에서도 자신감(self-confidence, self-esteem)은 제2언어 습득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억압(inhibition), 위험감수(risk-taking), 긴장감(anxiety) 등 많은 것과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먼저, 학습자는 외국어 학습 시 외국어와 관련된 자아(language ego)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억압(inhibition)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합니다. 효과적인 언어 습득을 위해서는 억압의 기제를 적절한 수준으로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자신감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죠.
긴장감(anxiety)은 언어 습득을 촉진하는 것(facilitative anxiety)과 학습을 저해하는 것(debilitative anxiety)이 있는데요. 학습자의 자신감이 너무 낮다면 효과적인 학습을 저해하는 긴장감이 높아지겠죠.
위험감수(risk-taking)란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약간의 모험을 감수하며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데 자신감에 따른 적절한 수준의 위험감수는 성공적인 학습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어릴 때 아주 짧더라도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과의 의사소통 성공 경험은 자신감의 씨앗이 되고 후에 자신을 믿고 영어의 습득, 학습 과정을 조금이라도 더 수월하게 지속시켜 줄 것입니다.
국제교류 업무를 담당한 적이 있습니다. 근무하던 학교는 미국에 있는 자매학교와 교류 중이었어요. 매년 상반기에는 미국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방문하고, 하반기에는 우리가 미국으로 방문하는 프로그램이었답니다.
일 년 동안 서로의 나라, 학교를 방문하여 문화, 교육 제도 등의 차이를 직접 느끼며 배우고, 홈스테이를 통해 더 깊은 우정을 맺어 갑니다.
당시 학생들의 후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영어에 별 흥미 없던 학생이었지만 국제교류 프로그램 참여 후 "선생님 영어 공부 열심히 해야겠더라고요."는 말을 했습니다.
영어를 시험을 치르는 교과목들 중 하나로만 여겨오고 ‘공부, 학습’의 대상으로 여겨온 학생들은 국제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국적이 미국인 또래 친구와 함께 장시간 생활하고 ‘의사소통‘하는 경험을 통해 영어 학습에 대한 관심과 동기가 생겼나 봅니다.
중학생만 되어도 청소년기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 있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쭈뼛쭈뼛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취학 전 아이들이나 초등학생들은 외국인과 아주 짧게라도 대화의 경험만 있다면 영어에 대한 자신감과 영어 습득 및 학습 동기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조금이라도 영어에 노출이 되어있고 간단한 영어 회화 정도는 이해 및 표현할 수 있는 상태에서 원어민과의 대화가 이뤄지면 금상첨화겠지요.
꼭 회화 학원 등 사교육을 통하지 않고도 일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알게 된 외국인 동료나 친구가 있다면 잠깐의 만남을 통해 아이들에게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싹 틔울 수 있는 경험과 추억을 제공할 수 있겠습니다.
글을 시작하기 앞서 드렸던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아이가 그동안 어떤 경로로든 습득한 영어를 실제로 사용하여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과 소통에 성공하는 경험은 영어라는 언어의 본래 목적과 기능을 달성했다는 점에 있어 영어에 대한 자신감, 흥미, 나아가 영어 습득 및 학습 동기를 얻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이유입니다.
다음 글은 영어가 더 재미있어진 저의 중학생 시절 이야기를 이어 나가 보겠습니다.
* 글 제목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pixab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