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적당히 빠져나와야 하는 것
제가 고등학생 시절 완전히 매료되었던
독토와 당스는 과연 무엇일까요?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영국 팝 등 영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영국드라마 'Skins'를요. 영국 청소년들의 퇴폐적인 문화 및 생활을 주제로 한 드라마였습니다. 마약, 섹스, 자살 등과 관련된 그들의 이야기가 화면을 통해 흘러나왔어요. 중학생 때부터 영국, 영국 영어, 영국 사람에 대한 많은 관심이 있었던 저라도, 밝고 부드러운 스토리를 더 선호하는 저로서는 솔직한 마음으로 약간 멈칫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고생이던 저는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니콜라스 홀트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고, 그와 그의 친구들이 하는 영국식 영어도 듣기에 너무 좋았습니다. 또, 영어 듣기를 위한 음원에서 흘러나오는 영어가 아니라, 실제 영국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를 통해 흘러나오는 진짜 영어(authentic)를 향유하고 있는 스스로가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주인공의 외모에 매료되어 다 알아듣기 어렵지만 한 에피소드씩 드라마를 보고 있었습니다. 에피소드 내용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어떠한 장면에서는 독토, 어떠한 장면에서는 당스라는 표현이 명확히 들렸습니다. 독토, 당스의 의미에 어울리는 내용의 장면이었으니 평소 듣던 발음과 달라도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
독토는 의사(doctor), 당스는 춤, 춤추다(dance)의 영국식 영어 발음이었습니다. 미국 영어가 아니라 더 알아듣기 어려웠던 중에 명확히 들리던 저 단어들. 제가 스스로 듣고 이해한 단어여서, 동시에 미국 영어와 사뭇 다른 영국 발음이라 영국에 더욱 진한 매력, 관심, 호기심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이후로 영국 드라마, 미국 드라마, 시트콤 등 가릴 것 없이 검색해 가며 보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요즘처럼 OTT가 없어서 네이버 카페를 찾아다니며 자막이 잘 된 작품들을 골라 보곤 했었지요.
워낙 TV 프로그램을 좋아하던 저인지라 우리나라 시트콤, 드라마, 음악 프로그램 등을 꼭 챙겨봤습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었음에도 절제하지 못하고 많은 시간을 영국, 미국 드라마 등 동영상 보는 것에 쓰고 있을 땐 '이건 괜찮아, 영어 듣기에도 도움이 될 거니까 봐도 돼'하면서 스스로 합리화했었습니다. 한결 편한 마음으로 시청을 즐겼습니다.
그런데 드라마, 시트콤, 노래는 영어 듣기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까요?
먼저, 저의 경우를 말씀드려 보면, 딱히 영어 듣기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진 않았습니다. 영국 드라마 Skins의 한 에피소드에서 얼마나 많은 양의 영어가 흘러나오겠습니까. 그중 자막 없이 알아듣는 비중이 반은 될까요? 영국 영어라 미국 영어에 비해 더 알아듣기 어려웠습니다.
영어 듣기 실력에 직접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은 없었지만 전반적으로 영어 공부에 대한 동기와 열정은 더 불타올랐습니다. 영국 영어에 대한 관심, 나중에 영국에 여행 가고 싶다, 임용 합격 후 교사가 되어 유학 휴직으로 대학원 석사 유학을 영국으로 가고 싶다는 꿈이 더 확고해졌으니까요. 그래서 더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었고, 힘든 영어 공부를 재미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저의 영어 듣기 실력을 높인 것은 매일 영어 듣기 문제를 풀어본 것입니다. 마더텅 문제집, EBS 영어 듣기 기출, 모의고사 영어 듣기 문제, 수능 영어 듣기 기출을 매일 풀어보았죠. 당연히 수능 영어 듣기를 잘하려면 그와 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매일 풀어보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요. 쉽게 추론되는 것입니다.
BTS의 RM도 미국 시트콤 <프렌즈>를 통해 영어를 잘할 수 있었고, 많은 유튜버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영어 공부법으로 미국/영국 드라마 시청을 추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왜 영국 드라마를 보며 큰 소득을 얻지 못했을까요?
미국, 영국 드라마와 같은 자료로 영어 의사소통 능력을 효과적으로 향상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영어가 대부분인 드라마를 보며 영어 듣기를 잘하고 싶다고 한다면 그 순간부터 소위 가성비 없는 학습을 해야 합니다. 그 드라마가 어느 정도 들리고 이해될 때까지 한국어 자막의 도움, 영어 자막의 도움을 받아 드라마 시청을 반복적으로 하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 그 드라마가 나의 영어 듣기, 말하기에 도움이 되는 자료로 변모하는 것이죠.
대한민국의, 영어 말고도 할 것 많은 고등학생들에게 이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비효율적인 방법입니다. 물론, 학생들에게 영어 습득을 위한 더욱 흥미롭고 재미있는 자료가 자유롭게 활용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의 시간적 여유가 허락되길 교사로서 진심으로 바랍니다.
학생들의 수준에 맞는 듣기 자료가 듣기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영어교육 이론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출처: <Practical English Language Teaching> by David Nunan, chapter 2. Listening)
You could ask what is authentic and natural anyway? We have already touched on the issue of speed. What is natural speed? Some people speak quickly, some more slowly. The average for native speakers of English seems to be 165-180 words per minute (wpm), but sometimes it jumps to 275 wpm. Even native speakers can get lost at that speed (Rubin, 1994).
With children learning their first language, we simplify (motherese). The advocates of "authentic only" would seem to deny this comprehensible input to foreign language learners, who, in many cases, lack that comprehension/acquisition rich environment that L1 learners enjoy. (중략)
위를 요약하자면, 무엇이 authentic/natural 한 것인가에 대한 기준도 모호할뿐더러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도 너무 말이 빠른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모국어를 배우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단순화된 말을 해준다. 진짜 영어만을(영어 학습을 위해 난이도를 조절하여 조금 쉽게, 단순화한 자료들, 예를 들면, 학습서 등은 사용해서는 안된다) 고집하는 사람들은 외국어 학습자들에게 이해가능한 입력(단순화되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 학습자료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영어를 모국어로 배우는 사람들마저 즐기는 이해가능한 입력이 풍부한 환경이 부족한 외국어 학습자들에게 말이다.
그러므로, 미드, 영드, 팝송 등, 진짜 영어를 학습자료로 영어 듣기 실력을 올리는 것에 목표를 두기보다 학업 스트레스가 있을 때 머리를 식힐 겸 콘텐츠를 활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와 다른 영미권 문화와 조금씩 들리는 영어는 영어에 대한 학습동기를 높여 줄 것입니다. 물론, 영어 의사소통 능력이 출중해 진짜 영어가 들리는 콘텐츠를 자막이나 부수적 자료 없이도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면 영어 실력을 더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일 것입니다.
영어 그 자체보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사는 나라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영어 공부를 재미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