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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 Choenghee Aug 25. 2023

참 달콤했던 40여분의 시간

정말 찰나의 순간에 갑자기 든 생각 덕분에

 여전히 30도를 넘고 뜨거운 햇볕에 땀이 나는 더위이지만 조금 선선해진 공기 덕분에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간 마치 지구가 태양과 제일 가까운 행성처럼 느껴질 정도로 더위라는 단어로는 부족한 고온에 태풍, 장마로 인한 습기까지 더해져 낮에는 도저히 나가고 싶지 않은 여름이 지속되었다. 그래서인지 아주 미세하지만 전보다 덜 무거워진 공기에 기분이 한껏 좋아져 딸을 태운 유아차를 기분 좋게 밀고 앞으로 나아갔다.


 주위 상점들과 사람들을 구경하며 여유로운 걸음으로 도서관에 도착했다. 그전에 빌린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고 남편이 요즘 빠진 서머싯 몸 작가의 <케이크와 맥주>라는 소설책을 대여했다. 작가들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고 해 이 책을 빌리고자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설렜다.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작가들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을까. 무엇을 먹고 마시며,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며,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쓸까. 어떤 루틴과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있는 것일까. 설렘으로부터 날아온 질문들이었다.


 드디어 <케이크와 맥주>를 내 손에 넣었다. 그전에는 딸을 유아차에 태우면 울기부터 해 결국 딸을 안고 유아차까지 짊어져야 해서 유아차의 효용가치가 없었다. 오늘 드디어 유아차가 쓸모를 발휘하기 시작했구나! 기분 좋은 바람에, 그토록 원했던 소설책까지. 걷는 길 위를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가벼운 발걸음이 모여 도착한 집 근처 카페. 배가 고프던 차에 달달한 라테를 주문했다. 유아차에 딸을 태워 단둘이 카페에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딸이 잠이 드는 것까지는 예상을 못했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 '아 제발 휴강했으면 좋겠다'하고 생각했던 그 강의가 내 눈앞 강의실 칠판에 '오늘 휴강'이라고 적혀있을 때 느꼈던 기분과 같다고 할까. 갑자기 내가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두어 시간이 눈앞에 턱 놓여 있는 기분.          

 


 주문한 커피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몇 모금 마시고 읽고 싶었던 소설책을 테이블 위에 두니 문득 이 순간이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코백 속에 든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시끄러운 커피머신 작동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빠른 리듬과 높은 피치의 음악 소리에도 딸은 깊은 잠에 들었는지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딸을 유아차에 그대로 눕혀둔 채 달콤한 커피를 마시며 책을 펼쳤다. 스무 쪽 정도밖에 읽지 못했지만 흥미진진했다. 진정 그 책이 좋은 책이어서인지, 그저 내가 좋아하는 주제를 다뤄서인지, 카페에 와서 커피를 즐기며 책을 읽는 이 순간이 그저 좋아서인지, 가을이 다가오는 걸 알려주는 바람 때문인지, 카페에 올 때쯤 잠이 든 딸이 선사한 선물 같은 시간을 향유하고 있어서인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독서의 재미와 순간의 행복감에 빠져있는 나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살피기 위해 메타적 시선에서 유체이탈이 된 상태처럼 나의 육체에서 빠져나와 살펴보아도 행복한 게 맞았다. 나는 실로 행복했다. 그 상태가 40여 분간 지속된 듯했다. 딸이 한 시간도 채 안 자고 잠에서 깼으니까. 짧지만 아주 달콤한 시간 40분이었다. 딸을 기분 좋게 어르고 나도 기분 좋게 귀갓길을 걸었다.




 

 육아를 하다 지쳐 거실 바닥에 몸을 뉘었다. 거실의 커다란 창 쪽을 바라보았다. 커튼이 조금 열린 틈으로 하늘과 구름이 보였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하루를 계속해서 살다 가는 것이 삶인 걸까, ' '이제 시간이 흐를수록 늙는 일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떤 행복이 더 있을까' 등의 삶에 대한 무상감만이 떠올랐다. 행복감은커녕 피로감이 쌓여 행동하고자 하는 동기나 의지도 잠시 내려놓은 채 그저 누워있으니 드는 생각들이었다.  

           

 갑자기 오늘 반납을 하지 않으면 연체될 책이 떠올랐다. 그리고 사용하지 않았던 유아차에 오늘은 딸을 태워볼까 하는 생각이 연달아 들었다. '울면 그냥 데리고 다시 집으로 들어오지 뭐'하는 생각과 함께. 그렇게 무거웠던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반납할 책과 폰, 지갑 등을 챙겨 딸과 함께 외출을 감행했다. 그 후에 180도 바뀌어버린 시간. 인생이 허무맹랑해 보여 멍하니 하늘만, 그것도 커튼 사이로 난 틈 사이로 빼꼼히 보이는 좁은 하늘만을 눈으로 붙잡아두던 시간이 찰나에 떠오른 생각과 뒤따라온 행동으로 참 달콤하고 행복한 시간으로 뒤바뀐 것이다. 거실에서 누워 하늘과 구름에 시선을 두던 그때 곧 카페에서 딸과 함께 스윗한 라테 한 잔을 마시며 감성 짙은 소설을 읽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쩌면 행복은 그리 어렵게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고, 행복 자체가 그리 먼데 있지도 않으며, 또한 그렇게 크고 특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답이 없는 고민을 하다 인생무상까지 느꼈으면서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찐행복을 맛봤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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